2014.10.08 10:20

장보러 가는 아이들

조회 수 1942 추천 수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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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가 혼자 장봐 온 거 몰래 사진 찍어놨어요”​

학교 협의회에 참석하러 오신 길에 000 어머니가 흐믓하고 대견한 마음으로 살짝 아들 자랑을 하셨다. 평소 미소가 아름다운 분이었는데 그날은 유난히 더 화사해 보이셨다. 그 전에는 어머니가 장보러 마트에 가면, 외아들인 000 이 엄마 뒤꽁무니 따라서 장보러 갔던 전 밖에 없었는데, 혼자서 적어준 대로 장을 잘 봐왔다고 대견해 하신다.

아마도 이 장면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분들도 있고, 대견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장 보러 가는 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매일 장보러 가는 건 아니고, 학교에서 이동수업으로 갈 때가 되면 아이들끼리 메뉴 정하고, 래시피 찾고, 직접 재료를 사러 장에 다녀온다. 도시에 있는 학교이고 보니 장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가까운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구입해온다. 래시피를 찾으며, 재료의 양에 조원들 수만큼 곱해서 전체 양을 가늠하니, 수학도 적용되는 통합수업이 아닐까?​

이런 수업을 해마다 지속적으로 해 와서인지 내가 있는 학교의 고학년들은 알아서 척척 익숙하게 이 과정을 해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저학년 동생들은 언니, 누나들이 하는 행동을 통해서 보고 배우는 점들이 아주 많다. 마트에서 재료 구입을 할 때 제조년월일도 확인하고, 같은 값이면 품질이 좋은 걸로 사는 방법을 익히고, 알뜰하게 1+1으로 묶인 것도 살피게 되는 등 생활의 지혜를 배우게 되는 시간인 것 같다.​

2014-04-17장보기1 (2).jpg


오늘도 학교엔 고학년들이 이동수업 가고 난 빈자리를 2~4학년 동생들이 지키며, 오후에 장보러 간다고 들떠있다. 다음주부터 2주간 이동수업을 가기 위해 미리 장보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식단 정하는 것부터 장보러 갈 때까지 들떠서 생활한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생기가 넘친다. 담임선생님과 같이 마트에서 장봐온 재료를 이용하여 미리 조별로 실습도 해보았다. 비빔국수, 떡만두국, 스파게티 등 간단하면서도 기술이 필요한 음식들을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만들어서 맛있게 먹어보았다. 비빔국수는 맵게 돼서 아이들이 옆에다 물을 놓고 연신 호호 거리며 먹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비빔국수가 매운 건 뭐 때문에 매운 것일까요?" "소금이요" "고추장이요" "고춧가루요" "네, 그래서 다음엔 고추장을 줄이고 간장을 이용해서 먹는 방법도 있어요"

또 한번은 2~4학년들이 텃밭에 직접 심고 가꾼 채소류를 이용하여 쌈밥을 만든 적이 있었다. 쌈밥을 대접받은 주인공들은 바로 어머니들이었다. 고사리같은 작은 손으로 직접 가꾸고 수확한 채소로 어머니께 드린다고 쌈밥을 만들어서 접시 위에 담았다. 상추 위에 밥, 고기, 쌈장 등을 얹어 가며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우리 엄마 드린다고 아주 예쁘게 만드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 그대로다. 이런 마음으로 만든 음식을 드시는 엄마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은 잠시 뭉클하였다.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주인공이세요'​

아이들이 이런 과정을 직접 경험하다 보니, 위 글 초반에 등장했던 000이 혼자 마트에서 장봐오는 모습에 어머니께서는 참 대견하게 생각하시게 되는 것 같다. 어른들이 보기엔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은 삶의 지혜를 배우고, 서로에 대한 관계를 배우고, 밥상에 차려지는 음식에 대한 감사함을 배우게 된다.​

  나도 어린 시절에 엄마가 장보러 시장 가신다면 할일 없이 엄마 뒤꽁무니를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다양하게 진열된 물건들이 내 눈을 두리번 거리게 만들고, 엄마가 자주 가시는 단골집 할머니의 덤 얹어주는 큰 손도 보게 되고, 가끔 맛보라고 집어주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정감어린 손길도 나를 흐믓하게 만들어주고, 어쩌다가 풀빵이나 호떡이라도 사주시면 그 것 먹는 재미에 장 보러 가는 게 참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장보러 가는 날이면 소풍 가듯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이젠 이런 즐거운 일들을 많이 커버린 내 아이들이 경험했고, 학교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일들이 많이 있다. 겉드러난 일들의 경중을 따져서 내 아이들에게는 이것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어른들 눈높이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런 작은 경험들을 통해서 하나, 둘씩 세상을 배우고 관계를 배우게 된다. 내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가슴 설레이고 신났던 일들을 하나씩 기억 창고에서 끄집어 내어서  내 아이에게 겪어보게 하면 어떨까? ​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소중한 경험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세상에 성큼 한 발짝 떼는 자신감이 쑥쑥 자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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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 2014.11.14 13:24
    선생님.. 글을 읽다보니 너무 정감있고, 마음이 느껴져 빠져들게 되네요.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장을 보는 것을 갖고 이렇게 글을 재밌게 쓰시다니요. 참 놀라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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