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수원화성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한양도성, 강화, 수원화성... 가을 역사답사는 3차례에 걸쳐 마쳤습니다.
마지막 답사지인 수원화성은 흔히 정조의 꿈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봐야했던 정조는
왕이 되고 나서 첫 발언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을 만큼 아버지에 대해 많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에 옮겨놓고 자주 왕래하였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잔치를 수원에 와서 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영조 시대부터 세력을 잡고있던 노론을 피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새로운 정치를 펴고 싶었던 정조는
당시 31살이던 정약용을 중용하여 거중기 등 새로운 기계를 활용하여
10년 예상의 공사기간을 2년9개월로 당겨
당시 최 첨단의 아름다운 화성을 건설하였습니다.
수원 화성 답사는 북쪽 문 장안문에서 시작합니다.
화홍문 입니다. 수원천 위로 지어진 수문입니다.
그 옆이 방화수류정.
수원 화성 전체가 적을 막기 위한 성이고 이 건물 역시 군사시설입니다.
그런데 참 아름답습니다.
군사시설을 이렇게 아름답게 지을 필요가 있냐는 말에 정조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름다움은 적을 두렵게 한다."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보이는 포대.
방화수류정의 벽과 난간을 감상해보세요.
성의 큰 대문들 사이에 숨어있는 암문들입니다.
화홍문 아래 홍예를 보러 내려갔습니다.
용연 옆에서 본 방화 수류정 입니다.
포대
1타안에는 총구가 3개 있고 5명이 근무를 하였고 5개 타마다 타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자신만의 군대를 최정예 군사들로 만들었는데
아래 사진은 그 군대-장용영의 외영(내영은 창덕궁에 있었음)의 본부였던 연무대 입니다.
연무대 위에 앉아 정조에 관한 이야기, 장용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북 공심돈 (일명 소라각)을 향해 성곽을 따라 걷습니다.
아쉽게도 출입금지 입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나선형의 계단을 밟아 올라갈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화성의 아름다움은 담장에서도 보입니다.
자연석을 다듬어 서로 엇갈리게 만든 것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비상상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 봉돈 입니다.
조선시대 유수가 파견된 곳은 봉수대를 설치해두었다고 합니다.
팔달문을 보기위해 길로 내려섰습니다.
팔달문 시장입니다.
시장통 지나 멀리 팔달문이 보입니다.
시장통 감자탕집에서 점심을 거하게 먹었습니다.
화성박물관 입니다.
박물관 앞의 공덕비가 인상적입니다만, 이 공덕비가 다 진심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박물관 앞뜰의 녹로.
이 기계로 무거운 돌을 쉽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는 녹로 오른편에 있었습니다.
(사진으로는 안보입니다.)
드디어 화성행궁입니다.
뒤주가 있어 한번 씩 들어가 보았습니다.
우주님이 들어갔다 나오더니 한 마디 합니다.
"나빴다~"
행궁 안 쪽 깊이 위치한 노래당.
정조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여기와서 살겠노라 이렇게 이름을 지어 두었답니다.
정조임금의 어진(초상)을 보러 갔습니다.
그리고 화성의 나머지-팔달문에서 화서문까지 남에서 서로 이어진 성벽을 보기 위해 다시 산으로 올랐습니다.
서노대 입니다.
서노대 바로 앞 서장대 입니다.
수원화성의 군사지휘본부 였습니다.
자, 이제 화서문으로 내려서면 화성을 다 돌아본 셈입니다.
화서문에서는 옹성에 올라 설명을 들었습니다.
여기는 반달형 옹성이 있습니다.
정조가 죽고 나서 몇 년 못되어 장용영은 해산되었고
수원 화성은 버려졌습니다. 6.25전쟁 때는 크게 파손되어 다시 복원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건설과정이 자세히 기록된 <화성성역의궤>가 있어 1997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정조의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꿈이 혹시 화성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전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몰라요.
화성답사 소감은 새싹들이 올리는 보고서에서 확인해보세요~
수고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