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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남아 있는 것

 푸른하늘 박연우

 

 

 이번에도 역시 맘눈선생님이 가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충경선생님이 가시지 않고 참밝음선생님이 가셨다. 강화도는 차를 타고 가야 했다.

 

 이번 수업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알 수 있는 수업이었다.

 청동기 시대를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것, 바로 고인돌이다. 그런데 강화도에 있는 고인돌이 죽기 전에 봐야 하는 100가지에 있다고 한다. 고인돌은 개가 아니라 기라고 센다. 고인돌은 높은 군장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인돌이 전 세계에 6만기 정도가 있는데 그 중에 크기가 다 제 각각이 라는 것이다. 엄청 작은 것도 있고 엄청 큰 것도 있는데 작은 것들이 있는 이유를 두 가지 이야기로 나누어 지는데 하나는 제사를 지낼 때 썼다는 주장이 있고, 하나는 군장이 죽은 것이 아니라 돈이 많은, 잘사는 사람들의 고인돌이라는 주장이 있다.

 두 가지의 주장 다 일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잘 사는 사람들의 고인돌일 것이라는 주장이 더 와 닿는 것 같다. 죽은 뒤에 손자, 아들 딸들이 더 잘 산다는 것을 좀 보여주고 싶었을 것 같다. 그래서 고인돌을 만들어서 나중에도 자기 가문을 돋보일 수 있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때 잘 살고 못 살고를 어떻게 판단 했는지를 알 수 없고, 돈도 없었으니 어떻게 그걸 판단 했을 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재사 때 고인돌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의 종류는 2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바둑 식, 탁자식이 있다. 바둑 식은 바둑판처럼 밑에 있는 돌이 4개이고, 위에 있는 돌이 사각형으로 되어있다. 탁자 식은 탁자처럼 밑에 있는 돌이 세워져 있고, 위에 있는 돌은 길게 세워져 있는 돌 보다 길게 되어있다.

 바둑 식은 정말 제사 지냈을 때 썼을 것 같다. 평평하게 잘 되어있고, 기울지 않게 돌이 4개가 있어서 제사상 같이 생겼다.

 

 구석기 때 대표적인 무기가 있다. 바로 주먹도끼이다. 주먹도끼는 돌을 쳐서 동물의 가죽을 벋기거나 풀을 자를 수 있게 뾰족하게 만든 것인데 이 주먹도끼가 뾰족한 것들도 있지만 약간 뭉툭한 주먹도끼도 있다. 그 것을 어떻게 구별하냐 면 뭉툭한 주먹도끼가 한 방향으로 깨졌다면 주먹도끼로 인정이 된다.

 

 움집은 신석기 때 나왔다. 생활을 여러 동굴을 사용하면서 생활 하다가 정착생활을 하다 보니 잘 집이 없어져서 만든 집이 바로 움집이다. 움집의 주재료는 풀이나 억새 종류였다. 하지만 지금 그 것을 알기 위해 형태를 만든 것이 쌀 지푸라기여서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25대 조선 왕인 철종은 꼭두각시 왕이었다.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살다가 글도 몰랐던 15살에 왕위를 즉위했다. 그래서 강화도령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등 제대로 된 왕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런 왕이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좀 잘 모르겠다. 꼭두각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지 다른 왕이 될 수는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조선이 외국과의 무역을 차단했던 때가 있었다. 그 것 때문에 외국과의 전쟁이 3번이 있었다. 프랑스와의 정묘호란이 있었는데 한 번 더 전쟁을 했는데 그 것이 병자호란이다. 또 한 번은 미국과 하게 되는데 그 것이 신미양요다.

 프랑스가 무역을 하려고 무력을 행세하면서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그 다음에 한 번 더 프랑스 군이 오는데 그 것이 병자호란이다. 이 두 번을 거쳐서 많은 조선의 물건을 가져갔는데 은 같은 것도 가져가고 의궤도 가져 갔다. 그 다음에 책이 있었던 외규장각을 불태웠다.

 

 규장각의 크기는 지금의 복귀 된 크기가 아닐 수도 있다. 아무리 피해 왔다고 해도 조선 왕인데 좀 더 컸을 것이다. 가늠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외규장각의 뒤에 산이 있는데 원래의 이름인 북산의 이름을 버리고 송학산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 이유가 외규장각을 개경의 축소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들어온 것인데 돈대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났는데 그 돈대는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조선 군들은 단 한 명도 미국에게 등돌리는 사람 없이 싸웠다. 돈대는 땅이 바다보다 둥글게 솟아있는 것을 돈대라고 한다. 미국은 프랑스와는 다르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 프랑스가 도망을 칠 때 다 가지고 갔다. 있다면 장군의 깃발이다. 그 깃발을 자기네 나라 어떤 대학에 걸어두고 있다가 지금은 빌려 놓은 상태다.

 단 한명도 등을 돌리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있을 수 있는지 멋있는 것 같다. 그리고 두려웠을 것 같다. 내 앞, 뒤에서 한 명씩 죽어가는데 기절도 안하고 아무리 불리해도 싸우면서… 존경스럽다. 나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 깃발은 남의 깃발인데 왜 가지고 가고 지금은 돌려주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뭐 아예 돌려주지 않고 빌려주는 것은 뭔가. 주지 말든가… 오히려 빌려줬다고 생각하니 우리 것을 왜 남이 빌려주는지 이해가 안가고 내 생각에는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인 것 같다.

 

 먼저 들어온 몽골은 공격을 하지 않을 테니 강화도의 성곽을 부시고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 것을 지었던 평민들은 돈도 못 벌고 만든 곳인데 자기 힘으로 부셔야 했다.

 너무 한 것 같다. 어쨌든 간에 힘들게 만든 것인데 다시 부신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좋아하겠는가 평민들의 결과로만 보자면 만들어서 다시 부신다는 것인데 생고생 한 거지 뭘 한 것인지 모른다. 귀족이면 “고맙” 일 수도 있지만 평민이 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모르겠다.

 강화도의 천도하고 나서 전쟁이 더 많이 일어났다. 그 만큼 희생되신 분들도 많았다.

 어제현, 어제순은 형제였는데 같이 싸웠다. 그런데 패배를 하고 말았다. 200명이 돌아가셨는데 거의 학살에 가깝게 죽였고 6~7개의 무덤으로 나누어 묻어야 했다.

 그 곳에서 나는 묵념했다. 그 묵념은 추모이기도 했지만 다시 이렇게 안 된다는, 새롭게 시작한다는 나의

 조선하면 이것을 바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의 왕들의 생활, 심지어 사생활 까지도 쓰여 있다는 그 것! 하지만 이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죽고 난 뒤 쓴다고 한다. 죽기 전에 쓰면 완성도 안 될뿐더러 그 글이 싫은 왕이 못쓰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에 대한 것들을 보고 싶어 했지만 결국은 볼 수 없었다.

 이 조선왕조실록은 실록이 있고 일기가 있는데 일기는 폐위를 당한 왕들의 이야기가 써있는 책이다. 그 왕은 연산군, 광해군, 단종(노산군)이다. 단종은 억울하게 되었으므로 실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글에는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광해군과 북인들이 폐위 당하고 서인과 인조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서인들이 북인들이 쓴 것은 잘못 되었다. 생각하여 다시 기록 한 것이 선조수정실록이다. 그런데 그러면 두 가지의 조선왕조실록이 생기는데 기본적이었다면 태우거나 버리는데 서인들은 그 것을 후세가 봐야 한다고 여겨 두 가지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사고의 위치는 총 4곳 이었다. 춘추관(서울), 충주, 전주, 성주.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주사고본 빼고 다 불타버렸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후였던 광해군 때 다시 왕조실록을 필사, 손으로 쓰는데 4개 가지고 불안 하여 5개를 만든다. 그래서 산에 박아두는 데 춘추관과 묘향산(적상산), 태백산, 오대산, 강화도(정족산)이다. 조선 후기에는 춘추관의 소장본은 이괄의 난 때 소실되어 오늘날까지 4편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오대산과 정족산에 있던 사고본), 부산 국가기록원(태백산에 있던 사고본), 김일성 종합대학(적상산에 있던 사고본)

 

 우리나라가 싸웠던 대포는 불랑기포라는 포르투갈에서 수입해온 것인데 고작 700m 밖에 나가지 않아서 한 사람이 신호를 주어서 맞춰야 했다.

 강화도에 있는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인데 탱자나무가 살 수 있는 한계 전에 있어서 그렇다. 탱자나무는 가시가 있어서 담장을 쌓기 어려울 때는 탱자나무로 대신했다.

 탱자나무를 생각하니까 예전에 우리말글 시간에 충경선생님이 얘기해주신 것이 생각났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왕이니 남쪽으로 나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나가야 했다. 여러 감정이었을 것 같다. 그냥 빨리 도망가려고 했을 수도 있고 어떻게 자신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었을 것 같다.

 

 하나씩 둘러보니 첫 번째 답사보다 더 내용이 적고 정리도 뒤죽박죽이었다. 뒤죽박죽인 이유는 아마도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둘러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고인돌 하나로 생각보다 더 많이 써졌는데 밑에 내려 갈수록 글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벌써 난 졸리다. 이 것을 쓸 때 좀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도 했다. 정리가 안돼서 나 조차도 어디가 어딘지 조금 했갈렸다.

 

 고려시대 때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구텐베르크보다 150년이나 앞섰지만 왜 우리나라의 것은 인정을 받지 못했을 까? 서로 다른 점은 고려는 한번 만들면 녹여서 썼는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글자를 하나하나 조합하여 만들기 때문에 계속 쓸 수 있다. 여러 번 녹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편리함 때문에 더 앞섰다고 말하지 않았을 까? 독일의 구텐베르크도 놋쇠에 글자마다 거푸집을 새겨서 활자를 부어 만들었고, 인쇄에 있어서도 기계로 눌러 찍는 법이 고안되고, 금속합금(金屬合金)에서도 주석과 납을 섞은 활자 쇠가 만들어져 인쇄술을 더욱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내가 이번에는 집중도 잘 안 되고 여러 이야기가 한꺼번에 들어와서 첫 번째 답사보다 더 힘들었다. 그리고 첫 답사보다 감정 이입 이라던지 여러 것이 겹쳐서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이 이야기 하고 계시는데 막 사루비아 꽃 먹고 그래서 좀 선생님께 죄송하고 다음 번에는 더 집중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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