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가슴 아픈 몇가지 장면이 떠 오른다. 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 도덕시험에서 0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3년이 지났을 때 나는 거의 100점을 받고 있었다. 이는 시험점수를 잘 받는 요령을 터득했기때문으로 판단된다.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때문이다. 또 하나는 초등학교 3학년시절 정규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서 칠판가득 산수문제를 써 놓고 그것을 풀라고 하는 장면이다.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먼저 푼 학생은 먼저 집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집에 가면 농사일을 해야 했기에 밖에서 나가 놀고 싶은 마음에 산수문제를 빨리 풀고 운동장에서 해질 때까지 놀다가 집에 갔던 기억이다. 이 선생님덕분에 나는 소위 말해서 공부를 잘 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부모의 기대를 품고 공단지역이기는 했지만 부산까지 유학도 가게 되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초등학교 6학년때이다. 모 스님께서 석가탄신일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라고 한 법어를 신문의 자투리에 발견하였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그 구절이 나의 마음을 확 휘어 잡았다. 그 이후 이것이 언제나 나의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관심사에 관심을 표해주는 사람을 6학년이후 만날 수 없었다. 겨우 ‘참 이상한 놈이네’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만났다. 결국 나는 나이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하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넷째의 장면은 중학교 시절과 관련된다. 중학교때는 소설책도 많이 읽고, 노래도 많이 듣고 싶었지만 그런 것은 공부와 무관한 것이라고 하여 못읽게 하고 못듣게 하던 것에 대한 기억이다. 물론 본인이 정말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나이때에 감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기반해서 적극적으로 개발해줄려고 하는 어른과 학교체계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이 장면들은 나에게 반면교사가 되었다. 이 장면들을 뒤집고 싶은 마음이 무식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시험에서 자유로운 학교, 자유로우면서도 유연하고 창의적이면서도 예의가 있는 학교, 인생의 근본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학교, 감성을 충분히 살려주는 학교, 노는 것이 공부가 되는 학교 등은 없을까?
이런 학교를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청소년정책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살면서, 사범대학 교수가 되어 이런 저런 학교를 연구해보면서도 나의 초점은 여기에 가 있었다. 일반학교는 아직도 대입시에 사로잡혀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 인생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진로를 모색하도록 하는 능력 함양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0년대를 전후해서 대안학교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국 이런 학교를 발견하기보다는 만드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런 과정에서 전인학교를 만들고, 내일학교를 만드는 것에 동참하게 되었다.
나에게 내일학교는 나의 인생에서 암울했던 장면을 더 이상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방책으로 모색된 것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가장 초보적인 소양을 길러주는 학교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