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아침 울력으로 꽁꽁 얼었을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호박죽을 끓였다. 죽을 저으면서 내일새싹학교 교사들 생각이 났다. 내일새싹학교는 매년 여름과 가을에 내일학교에 캠핑장비를 챙겨와서 한 달이나 며칠씩 이동수업을 하고 간다. 교사들은 24시간 내내 학생들을 보살피고 수업을 진행하여 힘들 텐데도, 아픈 학생이 있으면 죽을 끓여주었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과 정성에 그때 무척 감동하였었다.
죽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영실기암과 오백나한, 문화재청 사이트)
한라산 서남쪽의 영실(靈室)이란 곳에는 기암괴석들이 솟아 있는데, 오백장군 또는 오백나한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한 어머니가 아들 오백 형제와 살고 있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귀하던 어느 날 형제들은 양식을 구하러 나가고, 어머니는 큰 가마솥을 백록담에 걸어 놓고 아들들에게 먹일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죽을 젓다가 발을 헛디뎌 솥에 빠져 죽고 만다. 양식을 구하러 나갔던 오백 형제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죽이 있어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막내가 죽 속에서 뼈다귀를 발견하고 어머니가 솥에 빠져 죽은 사실을 알게 되고, 아들들은 통탄하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 버렸다.
슬픈 오백장군의 전설을 2008년 영실에 가서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내일학교와 그를 품은 커뮤니티 하늘자라는마을을 어떻게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에 대해 몇몇 분들이 함께 모색해보는 제주 기행을 하고 있었다. 빈손에다 피폐해진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발길이 무거웠던 그때 나는 그 이야기에 담긴 엄마의 희생, 자식들의 자책감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때 “우리가 힘겹게 학교를 열어가고 고생을 하더라도 아이들은 부모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지 않겠다. 우리 아이들이 부모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자기 성찰과 계발을 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그리고 자립하여 아이들의 자람과 성장을 보장할 수 있는 엄마가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였다.
내게는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오신 어머니가 계시다.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고 나니 그동안 눌러오신 울화와 망가진 몸의 질병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몇 년 동안의 치료와 치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자식으로서 어머니께 위안과 기쁨이 되고 있지 못해서 참으로 죄송하였다. 어머니는 당신이 가진 것이 없어 자식들에게 힘이 되고 보탬이 되어주지 못해서 늘 안타까워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더 죄송스러웠고, 나도 딸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하였다.
그리고‘내 딸에게도 이런 죄송한 마음과 자책을 대물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람지도선생님이 지도를 해주시는 전인학교와 내일학교에서 아이는 놀랍게 자라고 성장하여왔다. 나도 선생님께 가르침을 청하여 배우고 자기계발을 오랫동안 해오지만 성장 속도가 매우 더디다. 다 커서 성인이 된 딸에게 이제는 내가 의존하고 도움을 받는다. 생활에서나 언어 및 행동 습관에서 나는 딸에게 자주 체크를 받는다. 수긍하기도 하고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하면서 우리 모녀는 늘 토닥토닥거린다. 나는 딸이 보기에 철없는 엄마이다.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주된 요청은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도모해가면서 생존력을 높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굳어진 습관을 고치는 것이 힘들고 자기고집도 세서 버티기도 하지만 딸의 조언은 맞는 말이다.
어느 날 딸이 심각한 표정으로 “엄마 제 꿈이 하나 생겼는데요... 저는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하였다. 어른들과 함께 농장일을 하면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어른들의 도울 바를 접하고 그것이 잘 개선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힘들었다고 한다. 학생일 적에는 보이지 않던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 일에 철두철미하지 못한 모습들, 안일하고 나태한 생활습관들이 어른이 되니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런 어른이 되어갈까봐 두려웠다고 한다. 딸애가 자라온 긴 세월 동안 우리 어른들은 무얼 했던 것일까?
나의 소원은 평생 딸과 함께 사는 것이다. 딸을 도우면서 매일 딸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딸은 더 넓은 세계로 나가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크게 도와가는 삶을 바란다. 엄마의 작은 세계 속에 딸을 가두어둘 수는 없는 일이다. 딸과 함께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교류하며 살고자 한다면, 나는 지금보다 백배는 더 공부하고 훈련하고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그것이 딸의 자랑스러운 엄마로서 평생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나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아파하고 부담스러워하고 자책하는 원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매순간 더 나아지기 위해 자신을 개선해가고, 보다 더 열린 인간으로,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인간으로 자기를 계발시켜가기를 바란다. 그 길은 아이들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미래에도 밝고 희망찬 청사진을 열어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어머니와 아버지, 어른들을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해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가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