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는 회사 상사맨의 애환을 바둑을 두는 것과 연동시키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미생’이라는 제목 자체가 사석이 된 돌도 아니고, 두 집 이상이 나서 완생이 된 구조도 아닌, 돌을 더 두지 않으면 두 집이 되지 않아 두어 놓은 많은 돌들이 사석이 될 수도 있는 절박한 바둑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미생의 바둑돌이 살게 될지 죽게 될지는 바둑을 두는 사람의 선택과 의지와 지혜에 달려 있다. 그리고 집이 지어져 미생의 바둑돌이 살게 되었다고 해서 전체 바둑에서 승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장그래가 이런 저런 절박한 상황들을 극복하지만, 결국 원인터내셔널에 입사를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전체의 상황에서 보았을 때 장그래가 원인터내셔널에 입사하지 못한 것이 실패를 말하는 것이 될지 성공을 위한 길이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 다시 길이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다.”
장그래가 자신을 이해하는 동료들과 인생의 특정시점에서 성공을 하더라도, 그 성공의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는 패배를 하고 있다. 누군가 큰 성공을 할수록 상대편은 더 큰 좌절을 겪고 있다. 즉, 제로섬게임에서는 누군가 많이 가지면 누군가는 적게 가지게 되어 있다. 과연 이것이 인생의 참모습일까?
내일학교는 존중과 배려, 협력하기,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기,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상대의 다움이 잘 살아나도록 돕기, 상호이익, 인생에 대한 성찰과 비전그리기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의 이익이 너의 이익, 전체의 이익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격적인 됨과 원칙적인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삶은 칼부림과 변칙이 난무하는 사회속에서 생존조차 담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곤 하였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여망이기도 할 것이다. 제로섬게임에서 벗어나 모두가 잘 살아나는 진정한 완생이 우리 모두의 꿈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또 제로섬게임이 판치는 사회속에서,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사회속에서 이 여망이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심대히 우려를 한다. 더 나아가 이런 꿈은 단순한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다움의 꽃피우기, 다움과 다움이 연결된 집단지능, 집단지성, 함께 풍요로워지기의 문화가 가능한 것인가? 정말로 그 우위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