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png

 

내일학교에서는 '교사'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교실 앞에 서서 가르치고, 지식을 전수하고, 학생들은 칠판에 판서한 내용을 받아적고... 우리에게 익숙한 '교사'와 '학생'의 모습은 진정한 배움의 장을 만드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대신 우리는 '자람도우미'라는 호칭을 씁니다. 학교는 배움과 자람의 장이고, 어른들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생들의 자람을 돕기 위해 애쓰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내일학교에는 '교장선생님'도 없고, 다만 '자람지도 선생님'이 있을 뿐입니다. 

 

이름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는 역할도 일반학교의 '선생님'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내일학교의 자람도우미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함께 닭을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고,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는가 하면, 집도 짓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굴삭기를 몰고, 비행기도 운전합니다. 뿐인가요? 학생들과 함께 아침 조회인 '굿모닝 타임'에서 하루의 일정을 의논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다가, 시를 쓰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등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은 이렇듯 자람도우미 선생님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과 지성적인 토론, 예술적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일교육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배우고 성장하게 됩니다.

 

학생들과 함께 끊임없이 배우며 자기를 계발해 가는, 내일학교의 자람도우미 선생님들을 소개합니다.

 

 

 

bori.jpg

 

약력

한림대학교 심리학과

하늘새싹자람터, 전인학교 자람도우미

(前) 라이딩스쿨 대표이사

 

자격증

수상동력기 1급 조종면허

래프팅가이드 자격증

굴삭기 운전기능사

 

 

"아니, 그 성적이면 서울대를 지원해야지, 왜?"

 

스물 다섯 살 때, 저보다 너댓 살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수능을 보고 나온 성적을 두고 어머니께서 황당해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내일교육 커뮤니티의 전신인 '청자원'에 참여하게 되었고, 자람지도 선생님과 함께 커뮤니티를 일구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와 시작한 입시공부는 커뮤니티에서 했던 공부에 비해 무척 쉽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보다 높게 나온 점수에 저는 약간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춘천을 근거지로 초등대안학교 '하늘새싹자람터'를 꾸리고 있던 커뮤니티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에 한림대에 지원했고, 운좋게 수석 입학이 되어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속상해 하셨지만, 이미 저는 제가 평생 갈 길은 여기에 있다 마음먹었기에 후회는 없었지요.

 

이후로 제가 커뮤니티를 통해 경험했던 일들은 제 또래 친구들의 몇 배나 되는 다채로운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래프팅을 하기도 하고, 초경량 비행기 조종을 해보기도 하고, 농사를 짓는가 하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전국일주를 하고, 건물을 새로 짓고, 나무를 심고, 학생들과 함께 미국 서부 7개 주를 돌아다니는 기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자람도우미로서 학생들을 도왔지만, 동시에 그것은 저 자신에게 공부이자 성장의 기회이기도 하였지요. 

 

이후 봉화에 자리를 잡고, 내일학교가 기적처럼 생겨나고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저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물론 커뮤니티가 이어진 이십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하루하루 세아려 본다면 힘겹고 어려웠던 날들이 더 많았을 테지요. 그렇지만 누군가 저에게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같은 선택을 하겠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던 학생들이 어느새 눈을 반짝이며 미래를 꿈꾸고,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현장에서 같이 땀흘리고 고민하며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hyewon.jpg

 

약력

고려대학교 경영정보학과

하늘새싹자람터 자람도우미

리틀리더십 캠프 운영

명상메일 사진전 책임 큐레이터

내일학교 자람도우미, 수업 코디네이터, 상담, 영어수업

 

* 내일학교 미국유학센터 담당 자람도우미

 

 

"안녕하세요, 저는 내일학교 자람도우미 김은영입니다."

 

이것이 요즘 제가 사람들을 만나면 하게 되는 자기 소개입니다.  사실 저는 제가 이렇게 머나먼 시골에 와서 지낼 줄도 몰랐고, 학생들과 함께 부대끼며 선생님이라 불리게 될 줄도, 농사를 짓고 건물을 올리게 될 줄도 미처 몰랐답니다. 

 

처음 다니던 직장에서 연수차 홍천에 있는 '전인교육원'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저는 그저 '공기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 사람좋은 분들이 일하고 계시는 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농장도 없었고 학교도 없었고 폐교를 고쳐 지은 건물에서 몇몇 분들이 커뮤니티를 일구고 있을 뿐이었지요. 저는 그 분위기가 참 좋아 주말이면 찾아가 래프팅도 하고, 산에도 올라가고 김장도 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커뮤니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여름방학 무렵, 커뮤니티의 아이들이 방학이라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왠지 안쓰러워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캠프라도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주변에서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참여를 하는 바람에 수십명의 참가자가 북적대며 찾아와 정신없이 첫 캠프를 치렀지요.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한번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이 또 오고 싶다고 조르고, 캠프를 하다 보니 아예 학교보다 교육원이 더 좋다고, 계속 여기 오고 싶다고 떼를 써서 결국은 아이들의 등쌀에 밀려 '하늘새싹자람터'라는 대안학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인학교가 되고, 내일학교가 되어 결국은 지금에 이르게 되었네요.

 

그 과정 속에서 저는 등짐을 지고 모래를 날라 학교 건물을 짓기도 했고,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식사를 준비하기도 하고, 수백 개의 달걀 상자를 포장하는가 하면, 미국에 건너가 내일칼리지 학생들과 함께 새 터전을 닦기도 했습니다. 그 어느 순간도 쉽거나 만만했던 적은 없었고, 종종 한계에 부딪혀 좌절할 것 같은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왠지,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면 더 오기가 생긴다고 할까요? 내가 이걸 꼭 넘어서고야 말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 다시한번 이를 앙다물게 됩니다. 그 힘으로 지금까지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게다가 이젠 학생들을 보면 하도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그냥 조카 같고 동생 같고, 제가 땀흘려 지은 건물을 두고 어디 가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캠프가 좋아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던 아이들처럼 어느새 저도 그렇게 되었나봐요. 

 

처음에 제가 여기에 오겠다고 할 때 극구 반대하시던 부모님께서도 얼마 전에는 학교에 와보시더니, 눈을 흘기며 저에게 이렇게 얘기하시더군요. "얘, 너는 이렇게 좋은 데를 너 혼자만 알고 있었니?!" 그러더니 이 근처로 귀농을 하신다며 땅이며 집 짓는 법을 알아보고 계십니다. 부모님뿐만이 아닙니다. 내일학교 1기 졸업생들도 남들은 외국으로 어학연수 가는 여름방학에 거꾸로 비행기를 타고 봉화로 오지요. 저는 제가 도시를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졸업생들에게, 제 가족에게도 언제든 마음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고향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 활동을 하다가도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내일학교랍니다.

 

 

 

hanbyul.jpg

 

약력

부산 수산대학

내일교육에 20여년간 참여

 

자격증

목구조 건축 기능사

 

 

 

"이 기숙사는 저와 학생들이 직접 지은 건물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립니다. 웬만한 펜션보다 멋진 건물을, 그것도 한겨울에 고사리손 호호 불어가며 지었다고 하면 아마 저라도 믿기 어렵겠지요. 

 

돌이켜보면 제가 걸어온 길, 우리가 걸어온 길이 모두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일들 투성이였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방치된지 몇 년이 지나 동네의 쓰레기장이자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폐교를 공사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생짜 초보들이 고쳐 쓴다고 등짐지고 벽돌 날라가며 새 건물로 바꾸어놓았지요. 귀신나올 것 같은 폐가를 숙소로 쓴다고 뼈대만 남겨놓고 싹 새로 손본 것도 수 차례, 구들 밑에 또 구들, 그 아래 조선시대에나 깔았을 성싶은 다른 구들이 나오자 '차라리 철거하고 새로 짓는게 낫겠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던 일도 있었습니다.

 

남의 건물에 세들어 살다가 쫓겨나고 쫓겨나고를 반복하다가 봉화에 터를 잡고 모처럼 우리도 새 집을 짓는구나 하고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벽 치고 지붕만 올리면 될 줄 알았던 건물에 무슨 그런 후작업들이 끝도없이 늘어서 있던지요. 게다가 막상 지어진 건물에 살아보니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내가 좀더 전문적인 기술을 익혔다면 업자들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딱 맞는 건물을 지을 수 있을텐데, 그 안타까움이 마음에 남아 결국 몇 년 전, 목조건축학교에 입학하여 늦깎이 학생으로 대목 일을 익혔습니다. 종종 '나는 목수가 아닌데, 어쩌다보니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목조건축을 배워보니 내가 참 나무 만지는 일을 좋아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내가 살 집을 직접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입니다. 더 즐거운 일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특히 학생들과 함께 무언가를 상상하고 직접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학생들도 자기들이 직접 설계하고 못 박아 만든 기숙사를 남달리 사랑하고 아끼지요. 저 역시 제가 만든 공간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고, 또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하는 학생들을 보면 집짓느라 힘들었던 것은 까맣게 잊고 또다시 새로운 건물을 구상하게 되네요. 학생들과 함께,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웬만큼 고된 일들도 일이 아닌 즐거운 놀이가 되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blueriver.jpg

 

약력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사단법인 HAN 공보영상실장

전인학교 언론홍보담당

내일학교 제주 분교장

사진말전문갤러리 마음빛그리미 관장

 

KBS VJ클럽 객원PD

iMBC 교육코너 영상담당

 

 

 

"꼬끼오오오오오오~~~"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울어제끼는 수탉 때문에 앞마당 삽살개 네 마리가 일시에 짖어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불 속으로 몸을 잔뜩 구부정하게 구부려 기어들어가지요. "얘들아... 아직 네시다. 제발 부탁이다. 잠 좀 자자." 궁시렁 궁시렁하지만 어느새 몸이 익숙해져버렸는지 잠은 오질 않고 결국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밉니다.

 

낮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업무들을 처리하고 나면 먼동이 어슴푸르르하게 트기 시작합니다. 산속의 아침은 늦게 찾아오지요. 처음엔 새까맣게, 그 다음에는 푸르스름하게, 그 다음에는 황금빛으로. 아침의 빛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아직은 찌뿌둥한 몸을 쭉쭉 펴며 숙소를 나섭니다. 아침의 제 할일은 닭을 위한 풀베기. 예초기에 휘발유를 적절히 채워 넣고 안전모, 각종 안전장구들을 다 착용한 후 시동을 걸구 예초기를 짊어지지요. 지천에 널린 풀을 벨 때면 내가 닭이 된 기분입니다. 맛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지요. 큰 수레에 가득 풀을 싣고 닭살이장으로 갈 때 만큼 기분 좋은 때는 없습니다. 풀이 공급되어 계사 안이 수풀림을 이루고 닭들이 신나하는 것을 보는 것 만큼 뿌듯한 때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멍하는 닭들이 풀을 뜯어먹고 풀 위에서 노닥거리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아침 운력시간이 끝납니다.  멀리서 학생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요. “선생님, 식사하세요~~~”

 

왜, 이런 생활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묻곤 합니다. 그들은 편안한 도시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가족을 이루어 살기를 권합니다. 저 역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나에게 있어 교육은 무엇인지, 닭은 무엇인지, 함께 하는 동료교사들은 어떤 의미이며 삶은 무엇을 향한 항해인지. 저 역시 매일 매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쉬운 질문을 먼저 해보지요. 다시 도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스스로 대답합니다.  이미 멀리 와버렸다. 그것은 도시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우리와 자연을 상실한, 상실의 삶에 대한 의지적 거리두기라고 할까요. 제가 진실로 원하는 '참삶'에 대한 의지적 지향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것인가 다시 또 자문합니다.

 

저는 행복한 학교를 꿈꿉니다. 서로가 불행한 학교. 익지도 않은 벼를 강제로 고개 숙이게 하는, 나지도 않은 새싹을 강제로 잡아당겨 결국에는 뿌리가 말라비틀어지게 하는 교육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내일학교에서 보석 같은 교육적 성과를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학생은 누구나 고유한 성장리듬과 멜로디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존중되어지기만 하면 적절한 도움과 적절한 지도만 되면 누구나 아름다운 멜로디를, 중창과 합창을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 놀라운 기적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참 행복하고, 학생과 학교가 행복하고 함께 하는 동물과 식물, 나를 안고 키워 온 자연과 우주, 지구가 행복하게 되는 것. 그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대안을 나와 여기 함께 하는 이들이 보여주기로 결심하였고 힘겨움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당신이 건강하고 우리 모두가 건강한 삶, 당신이 행복하고 우리가 행복해서 내가 행복한 삶. 나는 그런 삶을 지금 여기서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hansum.jpg

 

약력

경희대학교 한의예과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원 한의학 박사

(前) 일본 도야마대학 부설 화(和)한약 연구소 연구원

춘천 KBS라디오 [라디오에 물어보세요]의 한방건강상담 진행 (1996년~2003년)

 

(前) 서울 양진당한의원, 춘천 한섬한의원, 서울 통의한의원 원장

(前) 전인건강마을 촌장

(前) 쁘레전인학교 교감

 

(現) 학교법인 전인학원 이사

 
 
 
"아니 선배, 시골에서 개업을 해요?"
 
후배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에게 물어볼 때, 저는 그저 허허 하고 웃었습니다. 선후배며 동기들은 모두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개업을 해야 뭘 해도 제대로 한다고 여기는 판에 웬만한 사람들은 찾아오기조차 쉽지 않은 봉화 촌구석에 한의원을 낸다니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군요. 
 
과연 봉화에서 한의원을 한다는 것은 서울에서의 경험과는 정말 다른 것이었습니다. 한의원을 운영하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저는 내일교육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만큼 저는 한의원 건축부터 식사 준비, 닭 돌보기까지 함께 하였으니까요. 서울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고된 나날이었지만, 오히려 저는 몸과 마음이 더욱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습니다. 기숙사를 짓는데 일손이 부족하다 하여 함께 흙부대를 올리다가 환자가 왔다는 전화에 다시 돌아가야 하기도 하였지요. 학생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공양 매니저'를 맡고부터는 식단을 짜고 식재료를 조달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아직 한의원도 내일학교도 자리잡기 전이고 만들어가는 과정이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낙관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른 것이 아니고, 마음의 치유와 몸의 치료도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진대, 결국 '힐링'이란 병원에서 약이며 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속에서 함께 생활하며 가능한 것이겠지요. 내일학교에 체험학습을 하러 온 학생들이 '몰라보게 건강해졌다'라며 활짝 웃을 때, 시무룩한 표정으로 왔다가 어느새 활기찬 모습으로 뛰어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커뮤니티 생활이 치유를 돕는다는 저의 믿음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jaraim.jpg

 

약력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상명대 교육학과
춘천 태교센터 태교지도사
 
 
자격증
정교사 2급 자격증(중등)
수상동력기 1급 조종면허
 
 
"어? 자람도우미시라구요? 학부모님 아니에요?"
 
네. 저는 몇 년 전까지는 내일학교 1기생의 학부모였다가 지금은 자람도우미가 되어 2011학번 학생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내일학교에서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아이가 내일학교 1기로 입학할 때부터, 학부모 자람도우미 후원회원 할 것 없이 함께 학교를 짓고 학생들의 각종 탐방기행이며 프로젝트를 물심양면으로 함께 해 왔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제 아이가 내일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으로 떠난 뒤 저는 자연스럽게 자람도우미 모집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내일교육이 매우 좋아서 함께 만들고 일구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수 년간 학부모로서 전인학교와 내일학교에 많은 부분 참여해왔다고 자부해왔었지만, 막상 자람도우미로서 참여해보니, 또다른 장(場)이 펼쳐지더군요. 쑥 쑥 자라나는 학생들의 변화무쌍한 시기를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폭풍우 속에서 항해를 하며 동시에 배를 만드는 것과도 같은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던 학생들로부터 대견함에 숙연해지기도 하고, 때론 뜻밖의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또 아이들의 성장통을 함께 아파하며 겪게 되니 자연히 저도 나날이 자라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집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 아이를 이렇게 돌봐왔을 자람도우미 선생님들에게 새삼 고맙고 더 잘 살폈어야 하는 건데 하는 미안함이 앞서게 됩니다.
 
자람도우미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생들이 걸어가는 길을 동행하며 함께 겪으며 도와가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힘겨워할 때에는 등을 밀어주며, 때로는 쉴 수 있도록 품을 내어주다가도 가끔은 아이들이 해이해지지 않고 더 크게 성장하도록  엄하게 꾸짖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랍니다. 지난한 과정의 헌신과 오롯함이 필수적이라는 걸 재차 느끼게 됩니다.
 
때때로 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불현듯 울음이 터지곤 합니다. 많은 어려움에 처하며 아파하고 괴로워했던 아이들의 모습이 상기되며, 안타깝기도 하고, 장하기도 해서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짐짓 저를 놀리는 시늉을 하며 위로해주지요. 이렇듯 내일학교의 자람도우미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아이들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함께 할 수 있는 특권이면서, 동시에 아이들 못지 않게 스스로를 계발하고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함께 공감하며 아픔도 나누며 가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사무치게 아프면서도 행복한 자리이며 무한한 헌신과 겸손이 필요한 곳입니다. 무엇보다 참된 보람과 내일에의 희망과 비전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sijin.jpg

 

 

약력

서울대 외교학과 

'커뮤니티, 함께 사는 길(Creating a Life Together)' 번역 

 

 

고등학교 때의 저는 교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파랗고 투명한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돌을 던져 부숴버리고 싶던 학생이었습니다. 학교는 저를 이름대신 번호로 부르면서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 시까지 말 그대로 감금하는 감옥이었지요. 학교 밖의 세상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안학교가 생기기 전이었고, 자퇴라도 하면 평생 제 이마에 '실패자'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질 줄 알았습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험점수 몇 점이 떨어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화를 냈지만, 그때 제가 제 마음 속에서 죽어가고 있던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혼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이혼 가정의 아이는 일반 가정의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딱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법을 너무 쉽게 배운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머니는 제 안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는 제 안에서 어머니를 보고 힘들어하셨고, 저는 제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만한 존재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이상하게 저는 어린 시절과 십대 때의 고통과 괴로움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을까봐 두려웠고, '여고시절'을 미화하는 추억담을 들으면 화가 났으며,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대학 시절에 주어지는 잠깐의 자유는 이내 곧 고시공부, 취업 준비 그리고 평생 이어지는 또다른 감옥들을 예비하는 잠깐의 백일몽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그때,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임원이었던 제 숙부가 불혹의 나이에 과로사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처음으로 경험했던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저는 꽤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출세지향적인 삶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결혼이 행복한 가족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리고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저는 어린 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 교사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매일같이 학생들의 지저귀는 '쌤, 쌤'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혼자 살 거라 생각했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과 24시간 먹고 자고 일하는 커뮤니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화이트칼라로서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농사며 양계며 목공이며 페인트칠에 능숙한 '숙련 인력'이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서 행복하겠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해서 하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무언가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마냥 즐겁고 재미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천 마리의 닭이 일제히 모이를 든 저에게 달려들거나 폭우로 물길이 바뀌어 기숙사 안으로 흙탕물이 쏟아지거나 수십 명분의 식사를 혼자 준비할 때에는 모든 걸 다 던져 버리고 엉엉 울어버리고 싶기도 하구요.

 

하지만 지금은 파랗고 투명한 하늘을 보아도 울분이 터지지 않습니다. 힘든 일이야 많지만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될 거라고 낙관할 수 있습니다. 어떤 거창한 담론이나 주의 덕분이 아닙니다. 그저 '보통 사회'에서는 당연하다고 강요받은, 그렇지만 저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했던 것들에서 빠져나와 제 손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하고 있기에 느끼는 작은 자존감 덕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학생들에게 무엇이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 그리고 '네가 어떤 사람이건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작은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학생들의 자람을 돕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 아닐까요.

 

 

 
 
 
leeheyjin.jpg

 

 
약력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과 법과대학 대학원 졸업(행정법 전공)
제 50회 사법시험 합격
前 법무법인 나우리 변호사
現 법무법인 율헌 변호사
서울중앙지검 피해자 국선변호사
송파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자문변호사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XE1.8.13 Layout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