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학교에서는 '교사'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교실 앞에 서서 가르치고, 지식을 전수하고, 학생들은 칠판에 판서한 내용을 받아적고... 우리에게 익숙한 '교사'와 '학생'의 모습은 진정한 배움의 장을 만드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대신 우리는 '자람도우미'라는 호칭을 씁니다. 학교는 배움과 자람의 장이고, 어른들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생들의 자람을 돕기 위해 애쓰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내일학교에는 '교장선생님'도 없고, 다만 '자람지도 선생님'이 있을 뿐입니다.
이름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는 역할도 일반학교의 '선생님'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내일학교의 자람도우미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함께 닭을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고,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는가 하면, 집도 짓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굴삭기를 몰고, 비행기도 운전합니다. 뿐인가요? 학생들과 함께 아침 조회인 '굿모닝 타임'에서 하루의 일정을 의논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다가, 시를 쓰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등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은 이렇듯 자람도우미 선생님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과 지성적인 토론, 예술적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일교육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배우고 성장하게 됩니다.
학생들과 함께 끊임없이 배우며 자기를 계발해 가는, 내일학교의 자람도우미 선생님들을 소개합니다.

약력
한림대학교 심리학과
하늘새싹자람터, 전인학교 자람도우미
(前) 라이딩스쿨 대표이사
자격증
수상동력기 1급 조종면허
래프팅가이드 자격증
굴삭기 운전기능사
"아니, 그 성적이면 서울대를 지원해야지, 왜?"
스물 다섯 살 때, 저보다 너댓 살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수능을 보고 나온 성적을 두고 어머니께서 황당해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내일교육 커뮤니티의 전신인 '청자원'에 참여하게 되었고, 자람지도 선생님과 함께 커뮤니티를 일구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와 시작한 입시공부는 커뮤니티에서 했던 공부에 비해 무척 쉽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보다 높게 나온 점수에 저는 약간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춘천을 근거지로 초등대안학교 '하늘새싹자람터'를 꾸리고 있던 커뮤니티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에 한림대에 지원했고, 운좋게 수석 입학이 되어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속상해 하셨지만, 이미 저는 제가 평생 갈 길은 여기에 있다 마음먹었기에 후회는 없었지요.
이후로 제가 커뮤니티를 통해 경험했던 일들은 제 또래 친구들의 몇 배나 되는 다채로운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래프팅을 하기도 하고, 초경량 비행기 조종을 해보기도 하고, 농사를 짓는가 하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전국일주를 하고, 건물을 새로 짓고, 나무를 심고, 학생들과 함께 미국 서부 7개 주를 돌아다니는 기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자람도우미로서 학생들을 도왔지만, 동시에 그것은 저 자신에게 공부이자 성장의 기회이기도 하였지요.
이후 봉화에 자리를 잡고, 내일학교가 기적처럼 생겨나고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저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물론 커뮤니티가 이어진 이십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하루하루 세아려 본다면 힘겹고 어려웠던 날들이 더 많았을 테지요. 그렇지만 누군가 저에게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같은 선택을 하겠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던 학생들이 어느새 눈을 반짝이며 미래를 꿈꾸고,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현장에서 같이 땀흘리고 고민하며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약력
고려대학교 경영정보학과
하늘새싹자람터 자람도우미
리틀리더십 캠프 운영
명상메일 사진전 책임 큐레이터
내일학교 자람도우미, 수업 코디네이터, 상담, 영어수업
* 내일학교 미국유학센터 담당 자람도우미
"안녕하세요, 저는 내일학교 자람도우미 김은영입니다."
이것이 요즘 제가 사람들을 만나면 하게 되는 자기 소개입니다. 사실 저는 제가 이렇게 머나먼 시골에 와서 지낼 줄도 몰랐고, 학생들과 함께 부대끼며 선생님이라 불리게 될 줄도, 농사를 짓고 건물을 올리게 될 줄도 미처 몰랐답니다.
처음 다니던 직장에서 연수차 홍천에 있는 '전인교육원'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저는 그저 '공기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 사람좋은 분들이 일하고 계시는 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농장도 없었고 학교도 없었고 폐교를 고쳐 지은 건물에서 몇몇 분들이 커뮤니티를 일구고 있을 뿐이었지요. 저는 그 분위기가 참 좋아 주말이면 찾아가 래프팅도 하고, 산에도 올라가고 김장도 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커뮤니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여름방학 무렵, 커뮤니티의 아이들이 방학이라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왠지 안쓰러워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캠프라도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주변에서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참여를 하는 바람에 수십명의 참가자가 북적대며 찾아와 정신없이 첫 캠프를 치렀지요.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한번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이 또 오고 싶다고 조르고, 캠프를 하다 보니 아예 학교보다 교육원이 더 좋다고, 계속 여기 오고 싶다고 떼를 써서 결국은 아이들의 등쌀에 밀려 '하늘새싹자람터'라는 대안학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인학교가 되고, 내일학교가 되어 결국은 지금에 이르게 되었네요.
그 과정 속에서 저는 등짐을 지고 모래를 날라 학교 건물을 짓기도 했고,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식사를 준비하기도 하고, 수백 개의 달걀 상자를 포장하는가 하면, 미국에 건너가 내일칼리지 학생들과 함께 새 터전을 닦기도 했습니다. 그 어느 순간도 쉽거나 만만했던 적은 없었고, 종종 한계에 부딪혀 좌절할 것 같은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왠지,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면 더 오기가 생긴다고 할까요? 내가 이걸 꼭 넘어서고야 말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 다시한번 이를 앙다물게 됩니다. 그 힘으로 지금까지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게다가 이젠 학생들을 보면 하도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그냥 조카 같고 동생 같고, 제가 땀흘려 지은 건물을 두고 어디 가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캠프가 좋아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던 아이들처럼 어느새 저도 그렇게 되었나봐요.
처음에 제가 여기에 오겠다고 할 때 극구 반대하시던 부모님께서도 얼마 전에는 학교에 와보시더니, 눈을 흘기며 저에게 이렇게 얘기하시더군요. "얘, 너는 이렇게 좋은 데를 너 혼자만 알고 있었니?!" 그러더니 이 근처로 귀농을 하신다며 땅이며 집 짓는 법을 알아보고 계십니다. 부모님뿐만이 아닙니다. 내일학교 1기 졸업생들도 남들은 외국으로 어학연수 가는 여름방학에 거꾸로 비행기를 타고 봉화로 오지요. 저는 제가 도시를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졸업생들에게, 제 가족에게도 언제든 마음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고향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 활동을 하다가도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내일학교랍니다.
약력
부산 수산대학
내일교육에 20여년간 참여
자격증
목구조 건축 기능사
"이 기숙사는 저와 학생들이 직접 지은 건물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립니다. 웬만한 펜션보다 멋진 건물을, 그것도 한겨울에 고사리손 호호 불어가며 지었다고 하면 아마 저라도 믿기 어렵겠지요.
돌이켜보면 제가 걸어온 길, 우리가 걸어온 길이 모두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일들 투성이였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방치된지 몇 년이 지나 동네의 쓰레기장이자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폐교를 공사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생짜 초보들이 고쳐 쓴다고 등짐지고 벽돌 날라가며 새 건물로 바꾸어놓았지요. 귀신나올 것 같은 폐가를 숙소로 쓴다고 뼈대만 남겨놓고 싹 새로 손본 것도 수 차례, 구들 밑에 또 구들, 그 아래 조선시대에나 깔았을 성싶은 다른 구들이 나오자 '차라리 철거하고 새로 짓는게 낫겠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던 일도 있었습니다.
남의 건물에 세들어 살다가 쫓겨나고 쫓겨나고를 반복하다가 봉화에 터를 잡고 모처럼 우리도 새 집을 짓는구나 하고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벽 치고 지붕만 올리면 될 줄 알았던 건물에 무슨 그런 후작업들이 끝도없이 늘어서 있던지요. 게다가 막상 지어진 건물에 살아보니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내가 좀더 전문적인 기술을 익혔다면 업자들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딱 맞는 건물을 지을 수 있을텐데, 그 안타까움이 마음에 남아 결국 몇 년 전, 목조건축학교에 입학하여 늦깎이 학생으로 대목 일을 익혔습니다. 종종 '나는 목수가 아닌데, 어쩌다보니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목조건축을 배워보니 내가 참 나무 만지는 일을 좋아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내가 살 집을 직접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입니다. 더 즐거운 일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특히 학생들과 함께 무언가를 상상하고 직접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학생들도 자기들이 직접 설계하고 못 박아 만든 기숙사를 남달리 사랑하고 아끼지요. 저 역시 제가 만든 공간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고, 또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하는 학생들을 보면 집짓느라 힘들었던 것은 까맣게 잊고 또다시 새로운 건물을 구상하게 되네요. 학생들과 함께,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웬만큼 고된 일들도 일이 아닌 즐거운 놀이가 되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약력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사단법인 HAN 공보영상실장
전인학교 언론홍보담당
내일학교 제주 분교장
사진말전문갤러리 마음빛그리미 관장
KBS VJ클럽 객원PD
iMBC 교육코너 영상담당
"꼬끼오오오오오오~~~"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울어제끼는 수탉 때문에 앞마당 삽살개 네 마리가 일시에 짖어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불 속으로 몸을 잔뜩 구부정하게 구부려 기어들어가지요. "얘들아... 아직 네시다. 제발 부탁이다. 잠 좀 자자." 궁시렁 궁시렁하지만 어느새 몸이 익숙해져버렸는지 잠은 오질 않고 결국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밉니다.
낮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업무들을 처리하고 나면 먼동이 어슴푸르르하게 트기 시작합니다. 산속의 아침은 늦게 찾아오지요. 처음엔 새까맣게, 그 다음에는 푸르스름하게, 그 다음에는 황금빛으로. 아침의 빛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아직은 찌뿌둥한 몸을 쭉쭉 펴며 숙소를 나섭니다. 아침의 제 할일은 닭을 위한 풀베기. 예초기에 휘발유를 적절히 채워 넣고 안전모, 각종 안전장구들을 다 착용한 후 시동을 걸구 예초기를 짊어지지요. 지천에 널린 풀을 벨 때면 내가 닭이 된 기분입니다. 맛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지요. 큰 수레에 가득 풀을 싣고 닭살이장으로 갈 때 만큼 기분 좋은 때는 없습니다. 풀이 공급되어 계사 안이 수풀림을 이루고 닭들이 신나하는 것을 보는 것 만큼 뿌듯한 때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멍하는 닭들이 풀을 뜯어먹고 풀 위에서 노닥거리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아침 운력시간이 끝납니다. 멀리서 학생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요. “선생님, 식사하세요~~~”
왜, 이런 생활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묻곤 합니다. 그들은 편안한 도시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가족을 이루어 살기를 권합니다. 저 역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나에게 있어 교육은 무엇인지, 닭은 무엇인지, 함께 하는 동료교사들은 어떤 의미이며 삶은 무엇을 향한 항해인지. 저 역시 매일 매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쉬운 질문을 먼저 해보지요. 다시 도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스스로 대답합니다. 이미 멀리 와버렸다. 그것은 도시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우리와 자연을 상실한, 상실의 삶에 대한 의지적 거리두기라고 할까요. 제가 진실로 원하는 '참삶'에 대한 의지적 지향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것인가 다시 또 자문합니다.
저는 행복한 학교를 꿈꿉니다. 서로가 불행한 학교. 익지도 않은 벼를 강제로 고개 숙이게 하는, 나지도 않은 새싹을 강제로 잡아당겨 결국에는 뿌리가 말라비틀어지게 하는 교육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내일학교에서 보석 같은 교육적 성과를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학생은 누구나 고유한 성장리듬과 멜로디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존중되어지기만 하면 적절한 도움과 적절한 지도만 되면 누구나 아름다운 멜로디를, 중창과 합창을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 놀라운 기적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참 행복하고, 학생과 학교가 행복하고 함께 하는 동물과 식물, 나를 안고 키워 온 자연과 우주, 지구가 행복하게 되는 것. 그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대안을 나와 여기 함께 하는 이들이 보여주기로 결심하였고 힘겨움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당신이 건강하고 우리 모두가 건강한 삶, 당신이 행복하고 우리가 행복해서 내가 행복한 삶. 나는 그런 삶을 지금 여기서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약력
경희대학교 한의예과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원 한의학 박사
(前) 일본 도야마대학 부설 화(和)한약 연구소 연구원
춘천 KBS라디오 [라디오에 물어보세요]의 한방건강상담 진행 (1996년~2003년)
(前) 서울 양진당한의원, 춘천 한섬한의원, 서울 통의한의원 원장
(前) 전인건강마을 촌장
(前) 쁘레전인학교 교감
(現) 학교법인 전인학원 이사


약력
서울대 외교학과
'커뮤니티, 함께 사는 길(Creating a Life Together)' 번역
고등학교 때의 저는 교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파랗고 투명한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돌을 던져 부숴버리고 싶던 학생이었습니다. 학교는 저를 이름대신 번호로 부르면서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 시까지 말 그대로 감금하는 감옥이었지요. 학교 밖의 세상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안학교가 생기기 전이었고, 자퇴라도 하면 평생 제 이마에 '실패자'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질 줄 알았습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험점수 몇 점이 떨어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화를 냈지만, 그때 제가 제 마음 속에서 죽어가고 있던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혼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이혼 가정의 아이는 일반 가정의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딱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법을 너무 쉽게 배운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머니는 제 안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는 제 안에서 어머니를 보고 힘들어하셨고, 저는 제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만한 존재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이상하게 저는 어린 시절과 십대 때의 고통과 괴로움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을까봐 두려웠고, '여고시절'을 미화하는 추억담을 들으면 화가 났으며,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대학 시절에 주어지는 잠깐의 자유는 이내 곧 고시공부, 취업 준비 그리고 평생 이어지는 또다른 감옥들을 예비하는 잠깐의 백일몽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그때,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임원이었던 제 숙부가 불혹의 나이에 과로사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처음으로 경험했던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저는 꽤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출세지향적인 삶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결혼이 행복한 가족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리고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저는 어린 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 교사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매일같이 학생들의 지저귀는 '쌤, 쌤'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혼자 살 거라 생각했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과 24시간 먹고 자고 일하는 커뮤니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화이트칼라로서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농사며 양계며 목공이며 페인트칠에 능숙한 '숙련 인력'이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서 행복하겠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해서 하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무언가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마냥 즐겁고 재미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천 마리의 닭이 일제히 모이를 든 저에게 달려들거나 폭우로 물길이 바뀌어 기숙사 안으로 흙탕물이 쏟아지거나 수십 명분의 식사를 혼자 준비할 때에는 모든 걸 다 던져 버리고 엉엉 울어버리고 싶기도 하구요.
하지만 지금은 파랗고 투명한 하늘을 보아도 울분이 터지지 않습니다. 힘든 일이야 많지만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될 거라고 낙관할 수 있습니다. 어떤 거창한 담론이나 주의 덕분이 아닙니다. 그저 '보통 사회'에서는 당연하다고 강요받은, 그렇지만 저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했던 것들에서 빠져나와 제 손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하고 있기에 느끼는 작은 자존감 덕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학생들에게 무엇이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 그리고 '네가 어떤 사람이건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작은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학생들의 자람을 돕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