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농장이 있는 청명골은 마을로부터 머어어어얼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멀쩡한 밭에 무슨 만행을 저지르는지 동네 주민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 말이다.
그까짓 고춧대 세우는 게 뭐 어렵다고,
시절이 흘러흘러 벌써 빨간 고추가 익어가는데 아즉도 대를 안 세워 고추가 다 쓰러져간단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농사꾼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하지만 우리의 이 무관심과 나태가 무색하게도,
농약 한 번 안 치고 풀도 두어 번 밖에 안 매준 고추밭에서 빠알간 고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병에도 안 걸리고!!
처음 농촌에 와서 고추농사 짓는 것을 보았을 때,
두 번 기겁을 했다.
처음에 놀란 건 다들 마스크도 안 쓰시고 약을 하루걸러 뿌려서.
두 번째는 약과 먼지가 떡이 되어 고추에 찐득찐득 눌러붙어 있어서.
고추농사란 약으로 시작해서 약으로 끝나고,
그 다음엔 그 찐득하니 말라붙은 약+먼지를 닦아내어 건조기에 말리는
그런 일이었다.
그렇게라도 지은 건 국산이라고 그나마 구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그런 고추들과는 다르게
농사라기엔 좀 민망하지만 아무튼 잡초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빨갛게 익은 고추들은
밭에서 그 즉시 따서 아삭 먹으면 이게 뭐 고추인지 파프리카인지 아님 과일인지...
맵지도 않고 새콤하며 달콤한데 알싸한 향이 입안에 퍼지는 것이 은근 중독성이 있어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고추 따러 갔다가 어느새 돌아보니 다들 우적우적 고추 씹느라 정신이 없다.
▲ 따라는 고추는 안 따고...
▲ 이러고 있습니다.
기숙사 앞 평상에 고추를 널었다.
왠지 지나가면서 자꾸 만져보게 된다.
올해는 무농약 태양초로 담근 김치를 먹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