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21:30

수원화성보고서

조회 수 360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원화성 보고서

2015년10월21수요일

5학년 푸른마음

화성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정조가 자신의 부친인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읍치소를 이전하고 주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어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1794년 2월에 착공하여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되었다.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헥타르를 에워싸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 이전의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점 등의 특징이 있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공사의 자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

화성은 축조 당시의 특성이 잘 남아있어 높은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피해를 포함해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은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엄격한 고증에 따라 전통적인 기술과 재료를 사용해 복원하였다.

성곽의 중요 부분인 성벽, 4대문 그리고 각종 방어용 시설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어 군사시설이자 주거지역으로서의 화성의 모습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중요 건물을 포함해 유산의 모든 요소가 유산의 경계 안에 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부당하게 단죄되어 처형당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1776년, 영조의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풍수지리에 있어 가장 길한 장소인 화산에 이장하였다. 그는 아버지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근처에 용주사를 세우고 조정을 수원 팔달산 자락으로 옮겼다. 조정을 옮김으로써 정조는 당쟁을 끝낼 수 있었으며 왕권을 높이고 새 성 안에 있는 안전한 궁궐 내에 머물 수 있었다.

화성은 실학파의 거두 정약용(1762~1836)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축물은 전 영의정이자 형조판서였던 채제공(1720~1799)의 감독 하에 1794년~1796년 사이에 완공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하게 묘사된 거중기, 도르래를 비롯한 다른 특수한 건축 장비들은 화성 건축을 위해 디자인되고 제작되었다.

화성 행궁과 제례를 진행하는 사직단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물이 요새 주위에 건축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 중 일부는 뒤에 전쟁과 반란의 와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오직 행궁의 부속 건물인 낙남헌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성의 일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화성을 원래의 정확한 형태대로 복원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거대한 성벽은 팔달산 자락를 포함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는 규칙적이거나 대칭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땅의 지형에 따라 건축되었다. 성벽의 둘레에는 네 개의 문, 수문들, 관측탑, 지휘소, 다연장 화살 발사탑, 화기 보루, 각진 탑, 비밀 문, 봉수 탑, 보루와 벙커 등 본래 48개의 방어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온전히 남아 있다. 각각의 총안 사이의 벽에는 세 개의 총안이 있다. 네 개의 문은 중요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의 팔달문과 북쪽의 장안문은 석재를 기본으로 한 2층 목조 건물이며, 측면에 경비하는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고, 불로 구운 벽돌로 지어진 반달형 V자 보루들에 의해 차폐되어 있다. 이들 문은 수원 화성을 통과하는 주된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서쪽과 동쪽의 건물은 1층짜리 건물들이며,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도 역시 V자 보루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이 다른 성곽과 차별화되도록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평산성 형태를 기본으로 했다. 한국의 성곽은 전통적으로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했는데, 수원 화성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을 따로 두지 않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의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방어시설을 갖추고 망루는 물론 총안, 즉 총구멍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성곽의 용도가 다양했다. 특히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장점만 살려서 축성하였으며 제반 시설물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도록 배치했다.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두었으며 맞은편 높은 곳에 외부와의 통신시설인 봉수대를 벽돌로 만들어 세웠다. 화성 남북 단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동서 단에는 창룡문과 화서문을 세우고 남서와 동북 방향 높은 지대에 각기 화양루와 동북각루를 세워 비상시 군사 요충이 되도록 했다.

화성의 또 다른 특징은 도시 기반 시설이다. 화성에는 팔달산 기슭의 행궁과 화성 유수부 앞에서 정면으로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로 등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의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십자로 주변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여 상업도시로서 화성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정조는 화성을 물류경제와 국제무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은 것이다.

1964년에 성의 복원과 재건축 작업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각진 탑들, 지휘소, 관측탑, 보루, 그리고 다른 방어 시설들이 모두 튼튼하게 건축되었으며 최대한의 효율과 최소한의 노출을 위해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러싼 성벽과 문, 탑, 보루 등 기념물은 재료와 기법의 측면에서 진정성을 갖고 있다.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제21대 왕인 영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그 축성의 근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또한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 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것은 큰 뜻을 펴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충성스러운 신하, 군사력, 그리고 이들을 원만하게 다룰 수 있는 자금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했다. 정조는 수도인 서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려우며,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목적의 정치 공간을 아버지의 추모 사업과 연결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수원부는 딱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인 한편,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야망을 구현시킬 대역사를 당시 30세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에게 맡겼다. 처음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됐다. 1796년 10월, 단 34개월(중간의 6개월 정역)을 생각하면 28개월)만에 낙성연을 치렀는데 수원 화성과 같이 방대한 공사를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과 같은 젊은 피를 수혈하여 종전과 차원이 다른 계획에 따라 건설했기 때문이다.

수원 화성이 초고속으로 완공될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이 당대의 최첨단 기자재를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기중기와 같은 용도의 거중기다. 거중기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고정 도르래만 사용하지 않고 움직도르래를 도입하여 복합 도르래를 구성한 것이다. 고정 도르래는 물건의 중량에 해당하는 힘을 주어야만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지만, 움직도르래가 1개 있으면 절반의 힘만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다. 사용하는 움직도르래가 1개 늘어날 때마다 필요한 힘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바로 이 원리를 정약용이 이용한 것이다. 거중기 덕분에 화성을 건설하는 동안 인력을 아끼고 무거운 물체를 수월하게 다루어서 사고율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모두 11대였는데, 작업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고 한다. 정약용이 화성을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은 화성 성벽과 여장(성의 담) 사이에 검은색 벽돌이 끼어 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생김새가 눈썹 같다고 해서 눈썹돌 또는 미석이라고 부른다. 미석을 성벽과 여장 사이에 끼워놓은 이유는 물질이 상태가 변화할 때 부피가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벽의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든 채 얼어버리면 얼음의 부피가 팽창하는 힘으로 성벽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미석을 끼워놓으면 비나 눈이 와도 물이 성벽으로 스며들어 가지 않고 미석을 타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화성에 숨은 과학 원리는 더 있다. 화성의 성벽을 자세히 보면 전체 형태가 구불구불하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하여 아치를 만들면 더욱 견고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벽의 허리를 잘록하게 쌓음으로써 돌과 돌 사이가 견고하게 맞물릴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적병이 성벽을 쉽게 타고 오를 수 없도록 한 조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완벽한 아치 모양이 아닌데, 이는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재래식 기법에 익숙한 석공들이 정약용이 애초 의도한 설계 의도를 모르고 위로 가면서 돌을 밖으로 내밀어 쌓는다면 돌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화성의 성벽에는 이런 특징 말고도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바로 성벽의 높이가 다른 성들에 비해 평균 4m로 비교적 낮은 것인데, 왜 정약용은 제2의 도성이 될 화성의 성벽을 이렇게 낮게 만든 것이냐면 이는 당시의 전쟁 특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정조가 화성 천도를 구상하던 18세기 중후반에는 전쟁의 양상이 병사들이 성을 타고 넘어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화포로 성벽을 쏴 무너뜨려 점령하는 형태였다. 따라서 성벽을 높게 쌓아 대포의 표적이 되기보다 좀 낮더라도 대포를 맞더라도 견딜 수있게 높이를 낮춘 것이다.

성벽의 재료도 기존 성과는 사뭇 다르다. 기존 성들이 자연석이나 직육면체로 다듬은 화강암을 주요 재료로 쌓았다면 화성은 화강암뿐만 아니라 벽돌로도 성을 쌓았다. 이는 앞서 설명한 대로 대포의 포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화강암은 그 자체로 강도는 매우 강하나 돌과 돌의 이음새가 딱 들어맞지 않아 화포 공격과 같은 외부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게 깨지거나 빠질 수 있다. 이에 반해 벽돌은 벽돌 자체로는 강하지 않지만, 벽돌과 석회로 벽을 쌓고 그 벽 안에 흙을 채우면 화포의 강한 공격에도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처럼 수원화성에는 거중기라는 당시의 최첨단 기기와 전쟁의 양상까지 고려해 제작된 첨단 건축물이었다. 수원화성의 뛰어남은 이런 첨단 건축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화성을 지으면서 성의 형태는 물론 성을 쌓는 방법과 재료까지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성을 쌓으면서 만들었던 돌의 크기나 돌을 깎는 방법, 또 벽돌을 만드는 방법과 가마에서 굽는 방법 등 화성을 짓는 모든 것을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글과 그림으로 [화성성역의궤]라는 자료로 남겼다. 이는 화성을 잘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성의 보수나 관리, 유지보수에까지 신경썼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수원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를 갖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아직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의 전 영역과 팔달문, 화서문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경기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또한 ‘수원시 세계문화유산 화성 운영조례’는 화성 및 부대시설의 관람과 활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화성은 그 이전 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성곽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화성은 기존 성곽의 문제점을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를 참고해 포루, 공심돈 등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하고 이를 우리의 군사적 환경과 지형에 맞게 설치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발달한 실학사상은 화성의 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자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유럽의 성곽을 면밀히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독특한 성곽의 양식을 결정하였다. 화성 축조에 사용된 새로운 장비와 재료의 발달은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화성은 분지로 이루어진 터를 둘러싸고 산마루에 축조된 기존의 우리나라 성곽과는 달리 평탄하고 넓은 땅에 조성되었다. 전통적인 성곽 축조 기법을 전승하면서 군사, 행정, 상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도시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화성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급속한 사회 변화, 기술 발달을 보여 주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최찬호

화성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정조가 자신의 부친인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읍치소를 이전하고 주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어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1794년 2월에 착공하여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되었다.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헥타르를 에워싸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 이전의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점 등의 특징이 있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공사의 자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

화성은 축조 당시의 특성이 잘 남아있어 높은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피해를 포함해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은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엄격한 고증에 따라 전통적인 기술과 재료를 사용해 복원하였다.

성곽의 중요 부분인 성벽, 4대문 그리고 각종 방어용 시설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어 군사시설이자 주거지역으로서의 화성의 모습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중요 건물을 포함해 유산의 모든 요소가 유산의 경계 안에 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부당하게 단죄되어 처형당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1776년, 영조의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풍수지리에 있어 가장 길한 장소인 화산에 이장하였다. 그는 아버지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근처에 용주사를 세우고 조정을 수원 팔달산 자락으로 옮겼다. 조정을 옮김으로써 정조는 당쟁을 끝낼 수 있었으며 왕권을 높이고 새 성 안에 있는 안전한 궁궐 내에 머물 수 있었다.

화성은 실학파의 거두 정약용(1762~1836)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축물은 전 영의정이자 형조판서였던 채제공(1720~1799)의 감독 하에 1794년~1796년 사이에 완공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하게 묘사된 거중기, 도르래를 비롯한 다른 특수한 건축 장비들은 화성 건축을 위해 디자인되고 제작되었다.

화성 행궁과 제례를 진행하는 사직단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물이 요새 주위에 건축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 중 일부는 뒤에 전쟁과 반란의 와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오직 행궁의 부속 건물인 낙남헌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성의 일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화성을 원래의 정확한 형태대로 복원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거대한 성벽은 팔달산 자락를 포함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는 규칙적이거나 대칭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땅의 지형에 따라 건축되었다. 성벽의 둘레에는 네 개의 문, 수문들, 관측탑, 지휘소, 다연장 화살 발사탑, 화기 보루, 각진 탑, 비밀 문, 봉수 탑, 보루와 벙커 등 본래 48개의 방어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온전히 남아 있다. 각각의 총안 사이의 벽에는 세 개의 총안이 있다. 네 개의 문은 중요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의 팔달문과 북쪽의 장안문은 석재를 기본으로 한 2층 목조 건물이며, 측면에 경비하는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고, 불로 구운 벽돌로 지어진 반달형 V자 보루들에 의해 차폐되어 있다. 이들 문은 수원 화성을 통과하는 주된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서쪽과 동쪽의 건물은 1층짜리 건물들이며,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도 역시 V자 보루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이 다른 성곽과 차별화되도록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평산성 형태를 기본으로 했다. 한국의 성곽은 전통적으로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했는데, 수원 화성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을 따로 두지 않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의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방어시설을 갖추고 망루는 물론 총안, 즉 총구멍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성곽의 용도가 다양했다. 특히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장점만 살려서 축성하였으며 제반 시설물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도록 배치했다.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두었으며 맞은편 높은 곳에 외부와의 통신시설인 봉수대를 벽돌로 만들어 세웠다. 화성 남북 단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동서 단에는 창룡문과 화서문을 세우고 남서와 동북 방향 높은 지대에 각기 화양루와 동북각루를 세워 비상시 군사 요충이 되도록 했다.

화성의 또 다른 특징은 도시 기반 시설이다. 화성에는 팔달산 기슭의 행궁과 화성 유수부 앞에서 정면으로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로 등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의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십자로 주변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여 상업도시로서 화성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정조는 화성을 물류경제와 국제무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은 것이다.

1964년에 성의 복원과 재건축 작업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각진 탑들, 지휘소, 관측탑, 보루, 그리고 다른 방어 시설들이 모두 튼튼하게 건축되었으며 최대한의 효율과 최소한의 노출을 위해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러싼 성벽과 문, 탑, 보루 등 기념물은 재료와 기법의 측면에서 진정성을 갖고 있다.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제21대 왕인 영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그 축성의 근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또한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 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것은 큰 뜻을 펴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충성스러운 신하, 군사력, 그리고 이들을 원만하게 다룰 수 있는 자금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했다. 정조는 수도인 서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려우며,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목적의 정치 공간을 아버지의 추모 사업과 연결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수원부는 딱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인 한편,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야망을 구현시킬 대역사를 당시 30세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에게 맡겼다. 처음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됐다. 1796년 10월, 단 34개월(중간의 6개월 정역)을 생각하면 28개월)만에 낙성연을 치렀는데 수원 화성과 같이 방대한 공사를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과 같은 젊은 피를 수혈하여 종전과 차원이 다른 계획에 따라 건설했기 때문이다.

수원 화성이 초고속으로 완공될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이 당대의 최첨단 기자재를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기중기와 같은 용도의 거중기다. 거중기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고정 도르래만 사용하지 않고 움직도르래를 도입하여 복합 도르래를 구성한 것이다. 고정 도르래는 물건의 중량에 해당하는 힘을 주어야만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지만, 움직도르래가 1개 있으면 절반의 힘만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다. 사용하는 움직도르래가 1개 늘어날 때마다 필요한 힘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바로 이 원리를 정약용이 이용한 것이다. 거중기 덕분에 화성을 건설하는 동안 인력을 아끼고 무거운 물체를 수월하게 다루어서 사고율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모두 11대였는데, 작업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고 한다. 정약용이 화성을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은 화성 성벽과 여장(성의 담) 사이에 검은색 벽돌이 끼어 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생김새가 눈썹 같다고 해서 눈썹돌 또는 미석이라고 부른다. 미석을 성벽과 여장 사이에 끼워놓은 이유는 물질이 상태가 변화할 때 부피가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벽의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든 채 얼어버리면 얼음의 부피가 팽창하는 힘으로 성벽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미석을 끼워놓으면 비나 눈이 와도 물이 성벽으로 스며들어 가지 않고 미석을 타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화성에 숨은 과학 원리는 더 있다. 화성의 성벽을 자세히 보면 전체 형태가 구불구불하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하여 아치를 만들면 더욱 견고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벽의 허리를 잘록하게 쌓음으로써 돌과 돌 사이가 견고하게 맞물릴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적병이 성벽을 쉽게 타고 오를 수 없도록 한 조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완벽한 아치 모양이 아닌데, 이는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재래식 기법에 익숙한 석공들이 정약용이 애초 의도한 설계 의도를 모르고 위로 가면서 돌을 밖으로 내밀어 쌓는다면 돌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화성의 성벽에는 이런 특징 말고도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바로 성벽의 높이가 다른 성들에 비해 평균 4m로 비교적 낮은 것인데, 왜 정약용은 제2의 도성이 될 화성의 성벽을 이렇게 낮게 만든 것이냐면 이는 당시의 전쟁 특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정조가 화성 천도를 구상하던 18세기 중후반에는 전쟁의 양상이 병사들이 성을 타고 넘어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화포로 성벽을 쏴 무너뜨려 점령하는 형태였다. 따라서 성벽을 높게 쌓아 대포의 표적이 되기보다 좀 낮더라도 대포를 맞더라도 견딜 수있게 높이를 낮춘 것이다.

성벽의 재료도 기존 성과는 사뭇 다르다. 기존 성들이 자연석이나 직육면체로 다듬은 화강암을 주요 재료로 쌓았다면 화성은 화강암뿐만 아니라 벽돌로도 성을 쌓았다. 이는 앞서 설명한 대로 대포의 포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화강암은 그 자체로 강도는 매우 강하나 돌과 돌의 이음새가 딱 들어맞지 않아 화포 공격과 같은 외부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게 깨지거나 빠질 수 있다. 이에 반해 벽돌은 벽돌 자체로는 강하지 않지만, 벽돌과 석회로 벽을 쌓고 그 벽 안에 흙을 채우면 화포의 강한 공격에도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처럼 수원화성에는 거중기라는 당시의 최첨단 기기와 전쟁의 양상까지 고려해 제작된 첨단 건축물이었다. 수원화성의 뛰어남은 이런 첨단 건축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화성을 지으면서 성의 형태는 물론 성을 쌓는 방법과 재료까지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성을 쌓으면서 만들었던 돌의 크기나 돌을 깎는 방법, 또 벽돌을 만드는 방법과 가마에서 굽는 방법 등 화성을 짓는 모든 것을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글과 그림으로 [화성성역의궤]라는 자료로 남겼다. 이는 화성을 잘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성의 보수나 관리, 유지보수에까지 신경썼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수원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를 갖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아직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의 전 영역과 팔달문, 화서문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경기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또한 ‘수원시 세계문화유산 화성 운영조례’는 화성 및 부대시설의 관람과 활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화성은 그 이전 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성곽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화성은 기존 성곽의 문제점을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를 참고해 포루, 공심돈 등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하고 이를 우리의 군사적 환경과 지형에 맞게 설치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발달한 실학사상은 화성의 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자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유럽의 성곽을 면밀히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독특한 성곽의 양식을 결정하였다. 화성 축조에 사용된 새로운 장비와 재료의 발달은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화성은 분지로 이루어진 터를 둘러싸고 산마루에 축조된 기존의 우리나라 성곽과는 달리 평탄하고 넓은 땅에 조성되었다. 전통적인 성곽 축조 기법을 전승하면서 군사, 행정, 상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도시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화성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급속한 사회 변화, 기술 발달을 보여 주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1 붓 물고기 이야기-동화쓰기 file 충경 2021.12.13 36491
» 수원화성보고서 푸른마음 2015.10.25 3600
479 밥실험- 좋은 말, 나쁜 말 실험 6 file 참밝음 2014.10.28 2822
478 열정의 상징! 맨드라미차를 소개합니다. 4 file 참밝음 2015.09.10 1407
477 5.18에 대한 나의 생각 에세이 -푸른하늘- 1 file 푸른하늘 2015.05.25 1040
476 [새싹신문] 김밥 요리수업 2014년 12월 11일 / 초록나무기자 5 file 초록나무 2014.12.11 1032
475 플랜더스의 개 소감문 -푸른하늘- 2 file 푸른하늘 2014.12.22 1004
474 안중근 책 소감문-초록나무 4 file 초록나무 2015.01.26 957
473 초록나무 일산 꽃 박람회 보고서 file 초록나무 2015.05.09 952
472 안중근책 소감문 -푸른하늘- 1 file 푸른하늘 2015.01.26 927
471 56학년 여름학기 봉화이동수업 16일차 참밝음 2014.10.28 862
470 56학년 여름학기 봉화이동수업 9일차 - 해바라기 기자 참밝음 2014.10.28 822
469 자전거 동아리 소감문 2 file 우주 2015.01.08 792
468 플랜더스의 개를 읽고 난 뒤에 소감문 2 file 금빛바다 2014.12.22 791
467 56학년 여름학기 봉화 이동수업 2일차 file 참밝음 2014.10.28 770
466 해바라기님의 시 2 해바라기 2014.11.28 755
465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소감문;해바라기,박 지은) 1 해바라기 2014.11.28 748
464 해바라기의 꽃박람회 1 해바라기 2014.11.27 743
463 2014 지리산 종주 1일차....해바라기 | 프로젝트 수업 해바라기 2014.11.27 717
462 수원화성 답사 보고서 - 초록나무 1 file 초록나무 2015.10.25 70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5 Next
/ 25
XE1.8.13 Layout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