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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역할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보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역할, ’자람도우미’를 한다는 것은 참 쉽지가 않다. 누군가가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긴 한다. ’자람도우미는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의 자람을 돕는 존재이고…’ 그런데… 자람을 돕는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슬픈 일이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학교 선생님’들은 그다지 좋은 롤 모델이 되지 못했다. 가장 좋았던 분들도 ‘성실한 직업인’ 이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선생님들의 개인적인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일반 학교의 교육 시스템 자체가 배움의 온전함을 ‘교과목’으로 쪼개어 버리고, 함께 배우는 관계의 복잡성을 ‘학년과 반’으로 갈라 버리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도록 분리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람도우미’로 살기 위해, 나는 내 삶에서 만났던 모든 좋은 인연을 다 떠올려 그때그때 응용해야 했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뜻밖에도 수학 과외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분이 수학문제를 잘 풀어주어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왜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걸까?’, 혹은 ‘수학을 잘한다는 것이 학생들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기에 많은 것을 배웠다. 자기가 밥벌이를 하는 분야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자기성찰 지능을 필요로 한다. 나는 그 선생님과 과외 시간이면 ‘문제를 푼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나중에 그 선생님은 사교육 시장을 떠나 수학 연구자가 되었다. 여러 권의 책을 쓰기도 했다. 그 선생님이 쓴 첫 번째 책에는 ‘수학이 우리 삶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나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나에게 ‘논술’을 가르쳐주셨던 학원 선생님도 기억난다. 그분은 문학평론을 전공한 분이었는데, 그래서 우리에게 내주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양자물리학, 막스 베버와 같은 읽기 텍스트 사이에 슬그머니 김수영이나 김춘수의 시가 끼어 있곤 했다. 그분은 입시에 유리한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어느 대학에서 뭘 요구하는지 따위는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저 읽기 과제를 내주고 우리가 써간 글을 고쳐 주기만 했다. 칭찬은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수업이 너무 좋아서 2년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버스를 한 시간 반 동안 타고 가서 수업을 듣고 다시 한 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나중에 그분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 학부모였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에 대안학교가 막 생기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좀처럼 존경할 만한 분을 만나지는 못했다. 교수님들이 하는 일은 강단에 서서 강의를 하는 것이었고, 내가 하는 것은 그냥 듣고 받아 적고 시험을 보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한 분의 교수님과 수십, 수백명의 학생들 사이에 어떠한 인격적 교류가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이렇게 들을 거라면 그냥 강의 녹화한 것을 봐도 똑같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부당하게 재임용에 탈락한 어떤 교수가 ‘무학점 강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호기심에 한 번 가 보았다. 난방도 되지 않아 썰렁한 강의실에서 십수 명의 학생들을 두고 강의를 하는 광경에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그 무학점 강의를 7년간 했다는 것이다. 수업의 내용도 매우 흥미롭고 알찼지만, 나는 수업 내내 그 교수가 뿜어내는 절실함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해 그 무학점 강의에 ‘전출’을 했다. 

 

지금 와서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그분들이 이야기하는 지식이나 테크닉을 배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분들의 말도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선생님들의 표정과 눈빛, 몸짓에서 느껴지는 삶의 태도 그 자체를 빨아들이듯 흡수했던 것 같다. 말로는 거짓을 꾸며낼 수 있다.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할 수 있고, 부당한 것을 온당한 것이라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결코 속지 않는다. 저 선생님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인지, 자신을 위해 최선이 무엇인가 진심으로 고민해주는 사람인지, 자기 삶에서 진심으로 배운 것을 설파하고 있는지 어디선가 주워온 것을 줄줄이 읊고만 있는 것인지, 학생 스스로 이해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래서 사실, 나는 자람도우미로 살아가는 것이 조금은 두렵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결코 완벽하지 않고,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나를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할만큼  나의 모든 부분들이 자랑스럽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는 내가 십대 때 어른들을 바라보았던 불편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고, 때로는 그 기억 속에 지금의 내 모습이 겹치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학생들의 투명한 눈동자를 피해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십대 때의 기억과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끊임없이 재촉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도 든다. 학생들이 나의 말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본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식으로든 노력하게 되고, 때로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꽁꽁 싸매려다가도,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냥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곤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람도우미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배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면서 치켜 들었던 턱을 조금 수그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그런 내 노력을 알아주지는 않는다. 사실, 알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 그들이 나와 비슷한 연배가 되었을 때, 혹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때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학생들은 나와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한다. 나에게 인사하는 학생들은 그저 반갑고 즐거워 보인다. 그 눈빛에는 내가 십대 때 ‘선생님’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분노와 원망, 혐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함께 배워가는 사람’으로서의 신뢰와 우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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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학교 1기 졸업생 큰강, 그리고 한별샘. 보고싶다 큰강!

 

 

 

 

 

 

  • 울리미 2016.12.03 12:06
    함께 배워가는 커뮤니티에서, 선생님을 뵙게되어 무척 기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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