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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알람소리. 나는 천장등이 환하게 켜진 방에서 눈을 뜬다. 새벽 4시, 내 차례다. 밤새 한 시간 간격으로 순찰 당번표를 짰다. 당번 선생님들이 순찰 후 메시지를 올릴 때마다 깨어서 확인했지만 혹시 내 당번일때 못 일어날까봐 불을 켠 채로 잠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몸이 좀 찌뿌둥하다. 안 그래도 이번 주엔 잡초가 우거진 밭의 풀매기가 비상이라 매일같이 동트자마자 일어나 텃밭으로 내달렸던 참이다.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습관이 된 터인지 일단 일어나니 금세 정신이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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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턴과 무전기를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비는 거의 오지 않는다. 순찰해야 하는 포인트는 정해져 있다. 계곡물이 넘치기 쉬운 물굽이, 길과 계곡이 만나 교차하는 지점, 계사 주변과 내부, 기숙사 앞에 놓인 다리 정도다. 대부분은 어제 내린 비가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온 정도일 뿐,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길가에서 당귀 향이 난다. 정원에 심어둔 꽃들이 빗물을 머금은 채 한껏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나는 본래 하려던 임무를 순간 잊고 꽃내음을 들이마신다.

 

시골에 산다는 것은 투명하리만치 맑은 공기, 아름다운 풍광, 한밤의 정적과 같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호사를 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도시에서라면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될 무수한 것들을 매일 매순간 노심초사하고 챙기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역시 자연재해, 특히 불과 물이다. 여학생기숙사와 농장, 자람도우미 숙소가 자리잡은 청명골은 계곡에 자리잡고 있어 장마가 지면 순식간에 물이 불어날 수가 있다. 우리가 봉화에 자리잡은 지 벌써 십오 년 째, 장마로 큰 사고는 없었지만 계곡물이 불어 통나무 다리가 유실되고 고립될 위기에 처하거나, 5센티 차이로 계사 안에 강물이 들이닥칠 뻔하거나, 정원 한복판으로 계곡물이 흘러 애써 심은 꽃들이 떠내려간 일 정도는 소소하게 있었다.

 

물론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점에서 소소하다는 것이지,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의 일상은 '물과의 전투' 태세로 돌변한다.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삽을 들고 나가 배수로를 파고, 계곡물이 들이치지 않게 흙부대를 쌓고, 학생들에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대피지침을 전달하고, 한 시간 간격으로 서로를 깨워주며 순찰을 돌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장마철이면 매년 크고작은 위기상황을 겪었기에 최근 몇 년간 상반기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치수' 사업이었다. 도시라면 지자체가 알아서 해줄 일이건만, 봉화 시골에서 나라가 해주길 기다렸다간 살아 생전에 이루기도 어려운 수가 있다.  하지만 고작 몇십 미터짜리 석축을 쌓는 데 장비를 부르자면 수천만원은 우습게 날아간다. 그것도 수천만원이 있을 때의 얘기다. 돈을 아끼려면 우리 삶의 시간을 대가로 바쳐야 한다. 우리는 고민 끝에 3년 전 빚을 내어 중고 굴삭기 두 대를 샀다. 이런 장비는 팔아도 살 때 값 그대로라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됐다. 그리고는 선생님들이 중장비 면허를 따서 토목기술을 익혔다. 

 

백 년만에 한번 올까말까한 홍수라도 일단 오게 되면 그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다. 안전과 생명이 달린 문제이니 적당히 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설립자 선생님과 보리 선생님은 얼어붙은 땅이 살짝 풀린 초봄부터 쇠도 녹아내릴 한여름까지 굴삭기 안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오늘도 굴삭기는 주요 포인트에서 대기중이다.

 

순찰을 돌다보니 이런저런 기억들이 길가에서, 냇물에서, 돌 사이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다. 한 장소에 오래도록 산다는 것, 특히 그 장소 자체를 만들고 가꾸며 살아간다는 것은 공간 속에 삶의 시간을 켜켜이 쌓아간다는 것이다. 그 기억들은 말 그대로 지층처럼 쌓여 있다가 때로 지각변동을 일으켜 지표면으로 돌출되곤 한다. 

 

처음 병아리를 받았을 때 제대로 준비를 못해서 예정일보다 하루 늦게 받았던 일이 있었다. 이미 병아리는 부화장에서 알을 까고 부화했는데, 하루동안 잘 먹지도 못한 채로 한파가 몰아닥치는 12월의 봉화로 왔다. 병아리들은 도착하자마자 한 마리 두 마리씩, 수십 마리가 바닥으로 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저체온증이었다. 

 

비상이 걸렸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두 시간 간격으로 불침번을 서며 병아리를 한 마리 한마리씩 따스하게 해주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병아리를 조심스레 마사지해주기도 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결국 병아리가 절반 가까이 죽었다. 절반이라도 살려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병아리가 죽기 직전, 희미하게 한번 울고 동공이 열리며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리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계곡의 포장로를 걸으며 이 길도 예전엔 장마철이 되면 엄청나게 질척거렸던 생각이 났다. 차바퀴에 패이고 빗물로 진흙탕이 되어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얼마 전 학생들과 밭일을 하며 '삽질은 이렇게 하는 게 더 쉬워'라고 시범을 보여주자 남학생들이 '선생님 군대 다녀오셨어요?' 라고 물어서 한참 웃었다. 비오는 날 울다시피 하면서 삽으로 계사 주변 배수로를 파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절박한 시간 속에서 삽질은 저절로 손에 익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화장을 하지 않게 된 것은. 구두를 사지 않게 된 것은. 까매진 얼굴과 손발에 익숙해진 것은.

 

내 랜턴 불빛을 보고 닭들은 새벽이 온 줄 착각하고 홰를 치며 울어댄다. 횃대 위에서 조용히 쉬는 그네들은 오늘밤 순찰 불빛에 숙면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번 계사가 침수되면 뽀송뽀송한 바닥을 복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행히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보니 조금씩 먼 산이 밝아지고 있다. 동이 틀 시간이다. 전날 밤 호들갑을 떨며 학생들에게 우비와 장화를 준비시키고 언제든 대피하라 한 것이며, 차량과 굴삭기를 대비해놓고 선생님들을 들들 볶아 한 시간 간격으로 순찰을 돌아야 한다고 몰아친 것이 왠지 미안해졌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을 괜히 그랬나 싶다. 밤에는 별 일 없고 오전에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그냥 편히 주무시게 할 걸 그랬나 싶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 만의 하나가 문제인 것이다. 자다가 불어난 계곡물에 속절없이 당하는 일은 평생에 한 번도 일어나서는 곤란하다. 수십 명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가 하룻밤의 휴식이라면 그것은 기꺼이 치를 만하다. 청명골은 이제 완연하게 밝아졌다. 물기를 담뿍 머금은 정원이 사랑스럽다. 핸드폰이 울린다. 새벽 5시. 원래 울리던 아침 알람이다. 장마 전선은 강원도를 지나 경북으로 돌진 중이라 한다. 그 소식을 듣고 창밖을 보니 빗줄기가 점차 거세어지고 있다. 다시 누울 것 없이 그대로 일과를 시작해야겠다. 누가 그랬던가. 아침은 오는 것이 아니라 열어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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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성심 2017.07.03 10:45
    내일학교와 농장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애쓰시는 시진님, 그리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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