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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을 챙기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날에 챙겨주지 않으면 섭섭해할 사람들에게 적당한 선물을 안기고 할 일을 다 했다며 손을 털어버리는 것, 다른 하나는 그 날이 생겨난 본질적 의미를 되새기며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을 펴니 ‘김영란법 때문에 스승의 날인데 학교 선생님들에게 카네이션조차 줄 수 없어 대혼란’이라는 기사가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스승의 날이 왜 학교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이 되었을까? 왜 이 날은 ‘선생님의 날’이나 ‘교사의 날’이 아니라 ‘스승의 날’ 일까? 아니 대체, ‘스승’이란 무엇일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다른 모든 사람처럼 나 역시, ‘스승’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스승이 아닌 것’이 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선생님’이라고 되뇌이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수십 명의 어른들이 있다. 수업 시간에 딴 짓을 했다며 열 살짜리 아이의 뺨을 때리던 중년의 교사, 합창시간에 목소리가 커서 합창을 망친다고 혼을 내던 초임의 여교사, 모든 아이들의 급식비에서 이백원 씩 횡령하여 착복하던 교장 선생, 자신에게 대들었다며 앙심을 품고 수시 모집에서 불이익을 주다가 들통나자 ‘어차피 떨어질 거 뭐 난리냐’라며 당당하던 고3 담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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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끔 꿈속에 이런 복도가 나온다. (사진: Flickr@cameliatwu)

 

 

그렇다. 이것은 나만의 기억은 아닐 것이다. 생각만해도 몸서리치는 기억들, 돌아간다고 생각만 해도 악몽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복을 벗는 즉시 모든 기억을 묻어버리고 다시는 되돌아보지 않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들이 너무 괴로워서,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조금 다른 학교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이 ‘샘, 샘’하고 짹짹거리는 소리륻 들으며 잠을 깨고 있다. 

 

하지만 ‘이건 스승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건 쉽지만, ‘이런 게 스승의 삶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리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찾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시행착오를 동반한다. 당연히 모든 것은 완벽하지 않았다. 항상 언제나 무언가는 모자랐다. 습관적으로 지식을 전수하는 수업을 하다가 몸이 아파 앓아눕기도 하고, 화가 나서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신뢰의 가치를 미처 모르는 채 거짓말을 하는 아이에게 상처입기도 하고, 내가 과연 학생들에게 나서서 무언가를 이야기할 자격이 충분한 걸까? 두려운 날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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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과연 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을까? (사진: 김하늘)

 

 

내가 그냥 선생인지, 단순한 보호자인지, ‘스승’이라는 무거운 단어는 과연 언제쯤 편안하게 느껴질지 엎치락뒤치락 하던 중, 뜻밖에도 실마리는 아이들에게서 나왔다. ‘나’를 나무로 표현하는 수업을 하던 중 한 학생의 발표를 보고 눈물이 났다. 자신을 너무나 진솔하게 드러내면서 듣는 사람에게까지 위로를 건네는 모습에 마음 속에서 뭐라 하기 어려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래서 나는 그날 숙소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내 주었던 과제를 직접 해 보았다. 그리고 정말 놀랐다. 세상에, 이게 이렇게나 어려운 거였다니. ‘그냥 너 자신에게 솔직하면 돼’라고 말했을 때는 ‘그래, 힘들겠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는 것은 전혀 달랐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온몸의 껍데기가 모두 벗겨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 시기를 전후해서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다면, 학생들보다 아주 조금만 먼저 걸어보고 돌아와서 ‘괜찮다’라고 이야기해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는 학생이 스스로 걸어가며 찾아내야 한다. 위대한 진리도 자기 힘으로 직접 산을 타고 바다를 건너 얻어낸 자의 몫이다. ‘조금 먼저 태어난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가는 길에 피어 있는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려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때로는 질투가 난다. 내가 십수년 간 힘겹게 노력해서 얻어낸 것들을 학생들은 몇 달만에 쉽게 배워버린다. 그렇게 익힌 것을 기반으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내가 그 나이 때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것을 겪고, 할 수 없었던 사유를 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시기심을 가볍게 녹여버릴 수 있는 보람이 있다면, 그렇게 단단하고 강해진 학생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내며 나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미는 순간들이다. 아마도 나는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승은 ‘선생’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어른인 것도 아니고,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경구처럼 그냥 아이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함께 배우고 성장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가며 커져가는, 어떤 에너지였다. 선생과 학생이건, 부모와 자식이건,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들 사이에서건, 스승은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존재해야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존중과 존경이야말로,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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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하늘

 

스승의 날이다. 모든 기념일이 그렇지만, 그 날이 기념하고자 하는 정신이 살아있다면 형식이야 무엇이든 상관없는 일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 혹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학교 안에서건 밖에서건, 모두가 되새겨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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