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모임을 한지 일주일이 되어가네용.^^

 

그간 밴드도 만들어 다녀온 소감과 사진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주시 조천읍의 북촌리는 어떤 마을일까요?

 - 북촌리 마을약사

최근 북촌리 고두기 언덕 바위 그늘 유적과 약 3,000여년전의 신석기 시대 유물 500여점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북촌은 오랜 옛날부터 최소 단위집단으로 사람들이 계속해 살아온 여러 가지 자연환경 조건을 살펴 볼 때 북촌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다.

음료수의 경우도 제주시 동쪽으로 구좌읍까지 볼 때 북촌은 양질의 샘물(通泉)이 여러 곳에서 용출되어 삼양 신촌과 더불어 북촌 샘물은 식용수로서 최적합한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생업이 뚜렷하지 못했던 옛날의 경우 북촌바다 수산자원은 그 양이 풍부하고 다양하며 더구나 손쉽게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어 생활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옛날 고두리 언덕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근 河源지역 마가리 서우봉 기슭 대섶 등에는 사람들이 생존했던 흔적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 모두 북촌바다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릴 수 있는 지역이어서 바다를 중심으로 한 해산물 채취나 어업을 하면서 농경생활을 해 왔다고 한다.

북촌 해안선 동서 약 500m 이상의 城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고려원종때 환해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북촌해안가 검서개라는 곳에 얽힌 이야기로는 본선을 타고 온 뙤놈(중국인이 아니고 몽고군을 지칭하고 있음)과 싸웠던 곳이라는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삼별초란이 일어난 1270년 이전에 이미 이곳에는 주민들이 주거해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서우봉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산도 조선시대 지도에는 서산봉으로 표시되어 있어 서우봉 동쪽에 이미 오래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비록 소수 집단이긴하나 계속 사람이 살아오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에 와서 장씨, 이씨, 윤씨, 씨족들이 집단으로 주거하고 있었기에 尹李村이라는 말도 있었다.

점점 인구가 증가하면서 東洞, 廣石洞, 上洞, 興禮洞, 西洞, 海洞, 儀水洞 이렇게 7개 자연마을 중심으로 北浦里라 불리던 곳이 행정적으로 정비되면서 1910년에 북촌리로 바뀌었다. 뒷개(後浦)라고 불리기도 했다는데 이는 북촌뒤의 바다를 의미한다.

제주도의 마을형태를 보면 산촌지역 해촌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해안지역은 산촌과 달리 여러 자연취락이 합쳐서 한 개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학술적으로 볼 때 북촌리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해촌형 마을로 보고 있다.

북촌리에서는 지금부터 320여년 전에 벌써 마을 주민들이 자생적으로 마을의 발전과 개촌 기념으로 향사를 건립하여 마을의 모든 일을 자주적으로 처리하고 마을의 역사나 문서기록등을 보존하여 내려왔으나 4.3사건으로 인해 소실되었음이 안타깝다.

- 제주도청 싸이트 퍼옴.

 

첫모임 당일 페친분이 올려주신 자료가 있어 공유합니다.

 

- 북촌사건

1948년 12월29일 제9연대를 대체한 제2연대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연대 교체의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주 주둔군을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하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단원들을 토벌대에 합류시킨 것은 제9연대 보다 강경한 작전을 통해 조속히 사태를 끝내기 위한 조치이며, 이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와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 1949년 1월 17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마을 주민들이 집단총살당한 이른바 ‘북촌사건’이 벌어졌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북촌리 학살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들판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비무장의 무력한 남녀노소가 무참하게 희생된 것이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2연대 3대대 군인들'임이 밝혀졌다.

이날 아침 세화리에서 함덕리로 이동하던 군인들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두 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흥분한 군인들이 북촌리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불러모아 300여명을 집단 총살했다. 군인들은 살아남은 주민 중 함덕리로 피신한 100명이 넘는 주민을 또다시 총살했다.

집단학살이 벌어진 그날, 북촌 마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집은 불타고 마을 사람들은 가족의 시신을 찾으러 미친 듯이 뛰어 다녔다. 소와 돼지마저 놀라 날뛰었다. 마을 사람치고 피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북촌 마을은 이날 사건 이후 어쩔 수 없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게 됐다. 북촌리 전직 이장들로 조직된 모임인 마을원로회는 1993년 11월부터 이날의 학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여 479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북촌마을의 비극은 소설가 현기영이 1978년 '순이삼촌'이란 소설을 통해 만천하에 알려졌다. 4·3이란 낱말이 금기였던 시절, 현기영은 문학을 통해 4·3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현기영은 1941년 제주시 노형동 ‘함박이굴’ 마을에서 출생했다. 4·3당시 중산간 마을이었던 노형리도 확인된 사망자만 560명에 달할 만큼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던 마을이다. 그가 쓴 <순이삼촌>에서 ‘서촌마을’은 고향인 노형과 조천읍 북촌마을을 아우른 가상의 공간이다.

그는 이 소설로 인해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경찰서로 넘어간 뒤에도 계속 매질을 당해야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자 그는 다시 종로경찰서에 잡혀갔다. 이번엔 판매금지 조치된 책이 유통되고 있다는 이유였다. 개처럼 고문을 당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는 경찰서 2층에서 투신하려고까지 했다.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자료발췌  - 2007년 8월 7일 한라일보

 

- 북촌국민학교와 너분숭이 애기무덤

4·3기간 최대 희생 '제노사이드'의 전형

마을 앞 바다에 평화롭게 떠있는 다려도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북촌리는 4·3의 과정을 겪는 동안 3백30여 호, 1천5백여 명의 마을 인구 중 5백여 명이 토벌대의 보복학살로 희생됨으로써 리(里 )단위로는 최대의 피해 마을로 기록되고 있다.

북촌리는 4·3당시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본동 서쪽에 있는 '해동'과 선흘리와 경계지점에 위치한 '억수동'이란 자연 마을을 품고 있다. 이 마을은 일제시대 당시 항일운동을 한 선각자들이 많았고 해방 후에는 건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마을 포구에서 발생한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늘 군경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 제2연대의 강경작전

1948년 12월29일 기존의 제9연대를 대체한 제2연대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연대 교체의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주 주둔군을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하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단원들을 토벌대에 합류시킨 것은 제9연대 보다 강경한 작전을 통해 조속히 사태를 끝내기 위한 조치이며, 이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와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편 1948년 11월17일에 선포된 대통령령 31호의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은 해제되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이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죽음의 섬'으로 가엾게 존재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1월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백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된 것이다. 동시에 마을의 집들도 다섯 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 북촌국민학교에 집결

북촌국민학교는 4·3 당시 최대의 피해마을인 북촌리 학살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1949년 1월17일 아침 2연대(연대장 대령 함병선) 3대대(대대장 소령 정준철) 일부 병력이 월정주둔 11중대를 시찰하고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국민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실어 함덕 대대본부로 운반했다. 그러나 함덕 주둔 3대대 군인들은 스스로 찾아간 10명의 연로한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이군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살해버렸다. 그리고 2개 소대쯤의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아침부터 주민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으며 주민 모두에게 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북촌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갔으며 넋을 잃고 학교에 운집한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된 채 공포에 떨었다.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하고 있었다. 군 지휘관은 우선 민보단 부단장인 장윤관을 불러내 운동장을 돌라고 한 후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했다. 이어 학교 울타리에 설치됐던 기관총이 불을 뿜더니 주민 7명 가량이 쓰러졌다. 학교 운동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지휘관은 다시 북촌 주민들을 군경가족과 민보단가족으로 구분하여 군경가족을 제외한 주민들을 학살할 준비를 한다. 마침 도착한 대대장과 휘하 장교들은 임시로 타고온 앰뷸런스 안에서 즉석 회의를 했다. 집결시킨 주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이었다.

 

- 군인 경험삼아 인명사살

당시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 경찰로서 그날 임시로 대대장이 승차한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씨(78세)는 "앰뷸런스 안에서 대대장을 포함한 지휘관들이 의논을 하는데, 기관총을 걸고 집중사격을 가하자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다. 그런데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서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이 됐다"고 증언했다. 그때부터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분숭이 일대 등으로 끌고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또 당시 운동장에 있었던 김석보씨(72세)는 "어머니와 나는 용케 군경가족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치맛자락만 잡고 이리저리 쏠리던 10살 미만의 동생 셋은 끝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쳐 죽음의 길로 들어갔다"고 슬프게 말했다.

그때까지 넋을 잃고 총소리를 듣던 김병석씨가 대대장에게 호소했다. "대대장님 저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 친척도 있고 동창도 있습니다. 함덕은 큰 마을입니다. 친척들도 있을 것이고 살릴 수 있습니다."

이 호소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대대장이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리자 총살은 우선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벌써 3백여 명 이상의 주민이 학교 주변 이곳저곳에서 참혹하게 쓰러진 뒤였다.

죽은 자의 수가 워낙 많아서 시체는 살아남은 아녀자들에 의해 주변에 가매장했다가 사태가 진정된 후에 안장하였고, 온 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연고가 없는 시체들은 눈이 덮인 채 오래도록 방치되었다가 나중에야 야산에 묻혔다. 당시 엄마 품에서 함께 죽어간 어린아이들은 너분숭이 일대에 임시 가매장한 채로 지금도 조그마한 애기무덤으로 남아 있다.

북촌대학살이 있은지 5년 후인 1954년 1월23일 세칭 '아이고 사건'으로 북촌 주민들은 다시 한 번 4·3의 아픔을 되새겨야 했다. 이 날 전몰장병인 북촌 출신 김석태의 고별식을 끝내고 4·3 당시 애무하게 죽어간 주민들의 혼을 달래려고 술 한 잔 올리고 통곡한 것도 죄가 되어 신승빈은 이장직을 놓게 된다. 참으로 야속한 세월이었다.

 

- 아이들의 영혼

이날 함덕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여명 단위로 끌려 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 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날 학살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김석보 씨는 "어머니와 내가 그날 저녁 함덕으로 가기 전에 세 동생의 시신을 너분숭이에서 발견했다. 어머니는 뒷날 이곳에 와서 동생들의 시신을 너분숭이 구석에 임시 매장했다. 지금도 그때 묻은 자리에 그대로 동생들은 묻혀있다"고 말했다.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 있어서 '너분숭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애기무덤 20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4·3당시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제2연대가 제주에 주둔한지 달포 만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은 엄마품에 안긴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함으로써 4·3의 제노사이드의 비극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북촌리 주민들은 이 통탄할 사건을 해결하려고 1960년 '국회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대규모로 신고한 바 있으며, 지난 2000년도에는 제주도경찰국이 발간한 '제주경찰사'의 사실왜곡에 정면으로 항의하여 배포금지의 약속을 얻어 내기도 했다.

너분숭이의 애기무덤은 당시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잔디나 변변한 장식도 없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참혹하고 무모한 학살을 알려주기에는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현재 이곳에는 4·3유적지 정비사업에 따라 북촌학살의 비극을 알리는 소규모 기념관과 북촌 사건을 통해 4·3을 전국에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문학비가 들어 설 예정이다.

 

오늘날 삼다도 제주는 평화롭게만 보인다. 그러나 과거 제주섬에는 民亂이 적지 않았다. 19세기만 보더라도 ‘강제검의 난’,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이 있었다. 제주사람들을 만만히 보고 수탈을 일삼은 탓이었다. 4·3도 민란이라면 민란이다. 모두 한반도와 관련되어 일어났고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난리 뒤끝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제주섬의 100년 지배자 몽고사람들에게 저항했던 욕이 있다. ‘몽근놈의 자식’이란 욕이다. '호로자식'이나 'Son of Bitch'보다 더한 욕으로 쓰였다. ‘육지 것’이란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모르겠다. ‘놈’이란 인칭(人稱)도 없다. 당사자라면 비위가 상할 수밖에 없는 지칭이다. 사람도 아니란 뜻이 숨어 있다. ‘몽근 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욕이다. 제주이민자들이 듣기싫어하는 말이다. 세월이 얼마 쯤 더 흘러야 그때 반도인에 쌓였던 미움이 가실 것이다.

 

- 진행경과

 

- 북촌 초등학교앞 10시집결

- 북촌초등학교 학살현장 비석앞에서 북촌리 주민학살 전개과정 이야기) -) 너븐숭이기념관 방문 - 영상시청 및 그 당시 사건 상황에 대해 해설사가 안내 및 해설

- 북촌마을 4.3길 따라 북촌포구까지

- 점심식사

- 변장선쌤 개인사정(결혼식 피로연) 이동 후

- 이어 4.3.항쟁길 따라 돌며 마을 출사

- 함덕바당 이동 출사 및 감상

- 김수홍쌤 시(가있는)골(목)책방에서 함께 다과와 커피나눔 시간 후 마무리

 

저희가 만난 북촌의 앞바당과 마을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마치 언제 저런 아픈 상처가 있었냐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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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국진님이 올려주신 사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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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석님 공유해주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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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동님이 올려주신 북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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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장선선생님이 올려주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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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시선. 새로운 만남이지만 금방 친해질 수 있는 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그렇겠지요?

 

북촌리에 대해 깊이 알아보며 그 역사속에 시간을 가슴에 묻고 새로운 시간속을 함께 걸어 갑니다.

 

 

4월 두번째모임은 4월 15일 표선면 가시리입니다.

 

늘 가던 가시리가 아닌 새로운 가시리를 만날 수 있도록 공부해야겠어요. ㅎㅎㅎㅎ

 

 

 

  • ?
    jarim 2017.03.25 00:16
    아주 뜻깊은 시간이 되었겠습니다~ 마음빛그리미의 활동이 나날이 무르익어가는 것 같아요.
    애쓰십니다. 기쁨과 보람 많이 많이 열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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